하나로 이어진 문명 계보에 의구심
당대 비주류였던 14인의 철학 통해
정치적 필요에 전통·문화 취사선택
‘절대권위’ 서양史 허구 낱낱이 지적
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이재훈 옮김/ 열린책들/ 3만3000원
동양인들에게 서양은 문명과 과학의 상징으로 통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후반 개항과 함께 서양의 각종 과학기술과 문화가 전해지면서 당시 전통적 풍습이나 사회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동양과 서양의 근본적인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단계가 됐지만 한동안 서양은 동양보다 우월한 문명이라는 인식이 컸다.

책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서양의 개념을 낱낱이 파헤친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저자는 혼혈인으로 살면서 서양의 근본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서양 문명이 실제로는 다양한 전통과 문화를 배제하고 선택적으로 취사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서양사는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를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산업혁명,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로 연결된다. 하지만 저자는 수천년간 다양한 국가의 사상과 각종 정치, 종교 등의 문화로 얽힌 서양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해석했거나 유리한 쪽으로 정리했다는 추측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서양의 개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는 1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대부분 서양 문명의 경계선이나 주변부에서 머물렀던 사람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부터 로마 최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리빌라, 이슬람 최초의 철학자 알킨디, 매춘부이자 작가였던 툴리아 다라고나, 망명한 황제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흑인 노예이자 시인이었던 필리스 휘틀리, 식민지 출신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면 현재 유럽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지 않았고, 유럽을 지배하던 인종이 백인이 아니었다는 것, 서양이 비기독교와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해 혐오를 조장했던 과거 등을 확인하게 된다.

책에서 가장 먼저 다룬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걸작 ‘역사(Histories)’를 저술했다. 그의 저서는 서양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져 있고, 서양에서는 현재의 역사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역사의 아버지’로 통한다. 하지만 저자는 헤로도토스가 고대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보다는 동양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리스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 문화와 구분 짓는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심지어 당시 로마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아시아에서 온 난민의 후손으로 여겼다고 한다. 9세기 이슬람의 철학자 알킨디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가 서양인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그는 기하학, 의학, 논리학, 물리학 등 다양한 주제의 저작을 남겼는데 고대 그리스 문헌과 그 저자를 연구해 작성한 것이었다.
“알킨디의 삶과 저작은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거짓되었음을 드러낸다. 중세기는 사그라진 고대 그리스·로마라는 횃불을 유럽에서 조심스럽게 보존하여 후대에 다시 빛을 발하기를 기다린 암흑기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별개의 존재로 생각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유산을 차지하고 있었다.”(110∼111쪽)
책은 홍콩의 ‘일국양제’ 지위를 사실상 종식시킨 캐리 람 전 행정장관에 대한 장으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홍콩의 현실에 대해, 원래 중국의 땅이었지만 문화·정치·사회·경제 등 각 분야에서 서양의 전통이 덧씌워지면서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줬던 공간이 더는 그 특수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한다.
서양 위주로 써내려간 역사에 대한 고민은 현재에도 시사점을 준다. 미국 중심의 세계가 흔들리면서 패권 다툼이 심화하고, 그 밑바탕에는 다양성과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어느 한 쪽만 옳다는 독선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뿐 아니라 철학, 예술, 과학, 제도 등이 누군가의 권력과 이익을 좇아 만들어진 잣대가 된다면 후손들은 부정확한 역사를 배울 수밖에 없게 된다.
서양사를 과감히 뒤집는 내용이 주축인 만큼 책 발간 이후 서양 문화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미국의 서평 매체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s)는 “서구라는 개념을 비판하려는 열정 때문에 때때로 과장하는 부분이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 가디언은 “책 내용이 학술적인 부분이 많아서 일반 독자에게는 쉽지 않고 해석의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신선하고 깊이 있는 역사 해석을 제공하는 동시에 서양 문명의 본질을 재고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높이 사며 저자의 시도 자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쏟아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있고 서양 위주의 역사 서술의 한계를 느꼈던 사람이라면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서양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이 서양과 그 근본적 원칙에 대한 찬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동성, 혁신, 과거에 대한 창조적인 재상상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알킨디의 철학, 툴리아 다라고나의 시, 조지프 워런의 연성 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의문을 던지고 비판하며 주어진 지혜를 논박하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 대화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 역사를 다시 형성하기 위해 재상상해 보는 것보다 더 서양다운 것이 있을까?”(458∼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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