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계진/ 이종찬/ 한울/ 3만8000원
자서전(自敍傳)이 아니라 아들이 어머니의 삶을 대신 기록한 자서전(子敍傳)이다. ‘나, 조계진’은 우당 이회영의 며느리이자 이종찬 광복회장의 어머니였던 조계진 여사(1897∼1996)의 격동의 삶을 셋째아들인 이 회장이 정리해 쓴 회고록이다.

조 여사는 1897년 서울 종로에서 풍양 조씨 조정구 대감과 흥선대원군의 딸 정경부인 완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외세는 무자비하게 조선을 침탈했고, 민족은 저항했지만 주권은 넘어갔다. 수명이 다해가던 조선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난 조 여사는 1917년 우당의 아들 이규학과 결혼하며 독립운동의 상징 같은 집안의 일원이 됐다. 이후 중국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도우며 험난한 망명생활을 견뎠다. 해방 후에는 혼란스러운 해방공간과 6·25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겪었다.
450여쪽 분량 책에 담긴 글과 사진들에는 한국 근현대사 주요 장면들이 빼곡이 담겼다. 우당 가문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독립운동의 뒷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풀려나오는 한편, 옛일들의 사실 관계와 그런 일들을 회고하는 조계진의 분명한 시각이 드러난다.
이 책은 일제강점과 해방,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현대사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귀중한 자료인 동시에 한 조선 여성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생활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망명과 일제 감시 속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고, 가정 역시 여러 차례 풍파를 겪으며 흔들렸다. 두 딸을 병으로 잃었고, 미국 유학의 꿈은 좌절로 끝났다. 작은 가정을 이루려던 소망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한때는 자신의 삶에 실망해 불가에 귀의할 생각까지 했다. 명문가의 구성원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강인한 생활인이었던 조계진의 육성이 간접적으로나마 전달된다.
이 책은 이 회장이 아내 윤장순씨가 시어머니 조계진의 회고담 일부를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저 메모 수준의 정리였지만 공부가 더해지며 회고록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 회장은 “아들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쓴 자서전(子敍傳)이라는 표현에 부끄럽지 않은지 끊임없이 자문해가며 작업을 했다”며 “어머니의 삶을 특별히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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