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풀에 꺾여 걷는 운동이 편해져
늘 당연하던 것도 소소한 행복 돼
이제 나는 더 이상 뛰지 않으리라
동네 언덕에 폐교가 있다. 오 년 전 중학교가 신도시로 이전했다. 아침이면 그곳 운동장을 걷는다. 운동장은 묵정밭처럼 변했는데도 아이들이 오랜 세월 다져놓은 트랙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매일 아침이면 운동장을 걷는 노인 네댓을 만날 수 있다. 봄가을에는 조금 더 많은 주민이 나와 맨발로 흙길을 걷는다. 운동장 가에는 유물처럼 다섯 그루의 히말라야삼나무가 있고, 나무 그늘이 깊고 바람이 좋다. 나무 그늘에 모양이 제각각인 의자들이 즐비하다. 누군가 나무둥치에 낡은 벽시계를 걸어놓았다. 부채, 우산도 걸려 있는 걸 보면 폐교는 낮 동안 동네 어르신들의 휴식처로 쓰이는 모양이다.

두 해 전까지 나는 대학교 운동장을 걸었다. 학군단 학생들이 러닝 훈련을 하는 시간과 겹쳤다. 학생들의 활력이 좋아 따라서 뛰고는 했다. 그러나 이내 그 활력에 지쳤다. 어쩐지 페이스를 잃은 마라토너가 된 기분이 들고, 아침부터 파김치가 되곤 했다. 운동장은 속도라는 공기를 갖고 있다. 그 공기에 휩쓸리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나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는 범부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는 슬금슬금 이 젊은 공기에서 물러났다.
이제 나는 뛰지 않는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아침 뉴스를 들으며 노인들의 걷기 행렬에 합류해 천천히 걷는다. 앞서 걷는 노인을 추월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몸이 한 군데씩 기울어져 있다. 노인들을 따라 묵묵히 걷다 보면 걷는 일이 더없이 종요롭게 여겨진다. 두 다리를 놀려 걷는다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두어 해 전 가형이 병원을 드나들다가 이른 나이에 돌아갔다. 형은 몸이 웬만해져서 퇴원하면 자꾸 집 밖으로 나가 걸으려고 했다. 함께 고향을 방문했을 때도 들길을 한없이 걷고 싶어 했다. 길에서 쓰러진 일도 있었다. 형이 맘껏 걸어보지 못하고 떠난 게 가장 안타깝다. 형에게 걷는 일이야말로 실존적 통각이었을 테다.
가형의 사연이 아니더라도 아마 나는 걷는 일이 소중하다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나이가 알려주었을 것이다.
한참 일에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유일하게 꿈꾸는 일은 쉬거나 잠을 벌충하는 게 아니고 걷는 일이다. 이 일을 끝나면 하루 종일 걸을 거야, 하고 되뇐다. 가끔 생이 다 되어 눈을 감을 때를 생각한다. 마지막에 매달릴 이미지는 무엇일까? 가족, 직업적 성취, 그리운 사람들…… 물론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렴풋이 보리밭 사잇길을 한정 없이 걷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마 그건 열두어 살 무렵의 고향에서 가져온 이미지일 것이다. 바람과 햇볕을 맞으며 걷는 길이 그리울 듯하다. 이미지는 굉장히 사적이다. 막다른 생에 이르면 결국 인간은 단독자로서 자신을 만나지 않을까. 나는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걷는 사람이었으면 싶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이 사춘기 때였다. 어느 늦은 밤 밤새 걸어보자고 꾀어 함께 집을 나섰다. 그 무렵 나는 마흔 고개를 넘고 있었다. 마흔을 넘기며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기고, 장시간 무력증에 시달렸다. 세상만사가 허무했다. 매우 낯선 증세였다. 내가 마흔 고개를 앓고 있을 때 선배 하나가 “나이에 무릎을 꿇게”라고 조언해 주었다. 육체가 어느 문턱을 넘었는데 마음이 인정하지 못하고 반발해서 생기는 심리적 증세라고 했다. 나는 나이를 인정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니까 그날 밤 몸이 앞서는 사춘기 아들과 마음이 앞서는 중년 아비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우리는 도시 외곽을 벗어나 인근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밤새 걸었다. 오랜만에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밤 아이나 나나 어떤 고비를 넘겼다고 믿는다. 그 후 아이는 훌쩍 혼자 걷다가 돌아온다. 아이에게 걷기의 매혹을 알려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뛰지 않는다. 남은 생 동안 뛰는 일은 더 없지 싶다.
전성태 소설가·국립순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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