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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낮에 하늘이 어두워지는 걸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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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26 22:59:15 수정 : 2025-06-26 22: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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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이 한 짓을 굳이 보지 않고
스스로 순수했던 시절을 더듬어
삶의 폭풍 같은 실수와 수치심들
비바람에 깨끗이 휩쓸려 가기를

제럴드 머네인 ‘생쥐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소중한 저주’에 수록, 차은정 옮김, 민음사)

이 단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작가 소개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작가 제럴드 머네인은 ‘뉴욕타임스’ 기사처럼 “생존한 영문학 작가 중 가장 위대하면서 가장 덜 알려진 작가”로 보이기도 하고 국내에도 지난해부터야 책 두 권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개인적인 이유로는, 그의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익숙한 이야기 방식에서 좀 벗어나 있기도 해서이다. 혹시라도 누군가는 이런 지루하게 느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 라고 책을 덮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도 하고.

조경란 소설가

단편소설 ‘생쥐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의 화자 ‘나’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근무하는 아내 대신 집안일을 하며 하교할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구름이 몰려들면서 폭풍우가 시작되고 “낮에 하늘이 어두워지는 걸 볼 때마다” 과거에 교실 창밖으로 다가오던 폭풍우가 기억났다. 언뜻 보면 이 단편은 폭풍우로 인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나의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시작되는 걸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책이 있고 그 책을 갖게 해 준 사람은 아버지이다. “회색 세계의 아득한 부분”을 나에게 알려주고 경험으로 이끈 책을. 아버지는 교도관이었다. 자신이 그 일을 했던 14년에 대해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제 나의 유년과 헛간에서 길렀던 ‘생쥐’로 이어진다.

이 생쥐에 대한 기억은 천식을 앓고 있는 아들, 지금 폭풍우 때문에 학교에서 집으로 오지 못하는 아들 이야기로. 병실에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을 때 아들과 아버지는 가끔 작은 무언의 동작으로 대화하곤 했다. 아들은 생쥐 흉내를 낼 때가 있었는데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 작고 천식 때문에 약하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였다. 아버지의 말처럼 건강해지지 못하고 “자신이 언제까지나 부분적으로는 생쥐일 거라”는 듯. 유년 시절 내가 실험을 목적으로 키운 생쥐 중에서 한 번도 번식용으로 쓰지 않은 수컷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생쥐에 대한 한 단락의 진술이 이 단편의 결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었다가 다시 읽으면 아픈 아들이나 혹은 수치스러운 짓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순수한 때의 나로 묘하게 투영돼 읽히기도 하는.

느슨해 보이지만 통일성이 있어 한 문장도 건너뛰고 읽기 어려운 이 단편에는 “내 손이 하는 짓을 내려다보지 않았다”는 문장이 예외적으로 세 번이나 나온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준 실망 등을 포함해서. 폭풍우로 시작된 기억의 절정은 내가 저지른 실수와 수치심의 고백인가 싶다가 다른 손, 교도관이었던 아버지가 한 일을 독자가 다시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아버지가 손으로 한 작은 일, 어린 자고새를 섬 곳곳의 덤불에 풀어준 일은 십여 년 후 그 지역을 관광지로 만들게 되었다. 아들은 학교에서 무사히 돌아왔고 “그는 불행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북동쪽 언덕으로 흘러가는 마지막 구름을 보는 동안. 내일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어떤 소설은 “자아 탐구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마음의 보고서”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소설의 의미는 요즘 같은 여름 장마철의 어느 날 “낮의 하늘이 어두워지는 걸 볼 때” 독자에게 불쑥 표면으로 떠오르는 기억, 인상, 이미지를 되살리고 표현해 보고 싶다는 뜨겁고 깊은 파문을 일으키는 데 있지 않을까.

머네인은 자신이 태어난 호주를 평생 떠나 본 적도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해본 적도 없이 은자(隱者)와도 같이 살며 살아온 땅과 사람과 시간에 대한 기억을 꼼꼼하고 방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매우 지역적, 개인적으로 느껴지며 시점인물 또한 작가로 바꿔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자신의 픽션에서 탐구하고 싶은 지점은 미세하고도 유려한 사고와 문장들로 이루어지는 “기억의 지형”처럼 보인다고 할까. 우리는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하듯.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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