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물 내기도… 작가의 도전정신 강조
1995년 작 ‘악녀서(惡女書·글항아리)’와 2015년 작 ‘마천대루(摩天大楼·인플루엔셜)’. 대만 작가 천쉐(55·사진)가 20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한 두 책은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성격이 다르다. 데뷔작인 단편집 ‘악녀서’는 대만 ‘동지(同志)문학’(성소수자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며, 여성 간 정욕의 관능적 묘사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반면 ‘마천대루’는 타이베이 인근 초고층 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얽힌 진실을 다중 시점으로 좇는 미스터리 범죄물로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편견을 드러낸대. 드라마로도 제작돼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다.

천쉐 작가는 지난 22일 막을 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을 계기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20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문학 세계의 전환에 대해 “세월에 따라 바뀌는 관심사를 천천히 응축해 작품으로 쓴 결과”라며 “기존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순문학 작가로 분류되던 그가 ‘마천대루’를 발표했을 때 팬들은 충격을 표하기도 했지만, 작가는 기존 독자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책을 읽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독자도 있고 외면하는 독자도 있지만,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들도 계속 생겨납니다.”
‘마천대루’ 이후에도 경찰·탐정이 등장하는 범죄소설을 연이어 발표했다. 국내에는 번역 출간되지 않았지만, 타이베이국제도서전 대상 수상작 ‘친애하는 공범자’(2020), 대만 최고 권위 문학상 중 하나인 금전상 후보작 ‘한 번 더 죽을 수는 없어’(2022) 등에서 장르 서사를 통해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를 탐색했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 초고를 탈고하고 올 하반기 출간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이 작품 역시 서스펜스를 핵심 장치로 삼았다. 그는 “진실을 좇는 서스펜스는 인간성과 선악의 문제를 넓은 스펙트럼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준다”며 “독자 자신도 답을 찾아가도록 하는 매력적인 장치”라고 설명했다.

천쉐 작가는 ‘악녀서’를 출간한 30년 전부터 성적 취향을 숨긴 적이 없는 동성애자다. 성소수자 인권 향상과 대만의 동성결혼 법제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앞장서며,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산문집 등을 통해 공유해 왔다. 배우자이자 문학적 동지인 아내와의 결혼 생활도 공개한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소외된 이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저 역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천쉐의 일상은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주로 아내가 직접 만든 아침 식사를 함께한 뒤 글을 쓰기 시작한다. 간단한 간식을 먹고 오후 늦게까지 집필한 뒤 가벼운 운동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엔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책을 읽는다.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사랑과 글쓰기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에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어 “사랑이라는 말에는 연인 관계뿐 아니라 가족, 사회, 세계를 향한 사랑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파격적 성애 묘사로 자국 문단에 격랑을 일으킨 ‘악녀서’가 출간 30년 만인 이달 초 한국어로 번역된 데 대해서는 “딱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도서전에서) 한국의 수많은 젊은 독자들이 제 책을 찾아주셨어요. 한국의 젊은 세대는 이미 자기답게 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한동안 이 작품이 많이 읽히지 않던 시절이 있었지만, 상처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저를 이해해줄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서라도 반드시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계속해서 열심히 글을 쓰고 기다리면 됐지요. 보세요, 30년 후 한국 독자들이 저를 알아봐 주셨잖아요.”

공지영의 ‘도가니’, 김탁환의 ‘거짓말이다’ 등을 언급하며 “한국 작가들 덕분에 창작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다룰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말했다. 김초엽 등 젊은 한국 SF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고, ‘폭싹 속았수다’ 등 한국 드라마도 보았다고 했다. “한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저 역시 한국 독자들께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울러 한국의 동성결혼 법제화 운동도 꼭 결실을 맺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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