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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통 겪지만 …‘괜찮다, 함께 살아가자’ 말해주고 싶었죠

입력 : 2025-06-24 20:39:24 수정 : 2025-06-24 20: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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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 ‘치유의 빛’ 펴낸 강화길

여성 몸, 욕망·타인시선 충돌하는 전장
섭식장애 가진 30대 지수 통해 드러내
식욕과 원인 모를 등 통증 뒤엉켜 고통

“집필 때 실제로 몸 상태 나빠져 쉬어
최선 다한 거장들 삶 보며 다시 펜 잡아
‘한국형 女고딕소설가’ 별명 감사하죠”

“제 날개뼈 아래에 괴물이 살거든요. 그 괴물이 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어요. (…) 그놈은 제 살점을 찢고 고개를 쳐들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어요. 제 몸속을 쪽쪽 빨아먹고, 제 비명에 즐거워하며 몸집을 키우죠.”(‘치유의 빛’, 172쪽)

강화길(39)의 장편소설 ‘치유의 빛’(은행나무)은 감옥처럼 벗어날 수 없는 ‘몸’의 문제를 붙들고 끝까지 질주한다. 1인칭 화자 30대 여성 ‘지수’의 삶은 날개뼈 밑에서 올라오는 통증 탓에 언젠가부터 지옥이 된다. 대부분 사람이 잠든 시각,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몸부림치며 불면의 밤을 보내도 어김없이 아침 해는 뜨고 일터로 나갈 시간은 다가온다. 원인과 병명을 찾으려 수많은 병원의 문을 두드려도 뚜렷한 소견은 없고 통증은 잡히지 않는다. 나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내 등 뒤에서 자라는데 내 몸과 나는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강 작가를 23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장편소설 ‘치유의 빛’으로 돌아온 강화길 작가는 “모든 것에는 양가적인 면이 있고, 고통이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소설 속 ‘지수’가) ‘아파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갔으면 한다”고 웃었다. 남정탁 기자

소설은 여성의 몸이 타인의 시선과 개인의 욕망이 충돌하는 치열한 전쟁터라는 사실을 치밀하게 드러낸다. 열다섯 살 가을, 갑작스레 키가 크고 살이 찐 지수는 “곰처럼 거대한” 자신의 몸과 깊이 반목한다. 내내 굶고, 이따금 충동에 휩싸여 폭식한 후 먹은 것을 게워내는 섭식장애가 시작된다. 176㎝에 50㎏, 마른 몸을 가진 어른이 된 이후에도 강박은 계속되며 식욕억제제 ‘나비약’을 먹는다. 식욕과 뒤엉켜 찾아오는 통증에 시달리던 지수는 고통의 근원을 찾아 고향 ‘안진’으로 돌아간다. 옛 폐교 자리에 있는 일종의 대체의학 재생 수련센터 ‘채수회관’에 입소한 그는 과거의 기억을 추적하고, 중학생 시절 어떤 사건과 조우한다.

3부로 구성된 소설 2부에선 제사(題辭)로 배치된 성서 ‘욥기’ 구절이 소설의 세계에 들어가는 한 실마리가 된다. 혹독한 고통을 겪는 가운데 대답 없는 신을 향해 울부짖는 욥. 강 작가는 “소설을 구성할 때 욥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나을 수 있을지 아닐지 모르지만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는 욥이 정말 인간적이라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1부 제사로는 예수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회당에서 물리치는 마르코복음 한 구절을 인용했다. 무슨 뜻일까.

강 작가는 답했다. “성서에는 병과 병을 치료하는 존재의 관계가 많이 등장해요. 지수는 등 뒤의 괴물을 누군가 물리쳐 줬으면 하는데, 그 행위를 예수가 행하고 있어요. 이 구절이 소설의 시작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2018∼19년 문학잡지 악스트에 연재한 글을 개작한 결과물이다. 그 사이 장편 ‘대불호텔의 유령’(2021), 단편집 ‘화이트 호스’(2020), ‘안진: 세 번의 봄’(2023) 등을 엮었지만, 단행본 ‘치유의 빛’이 세상 빛을 보기까지는 유독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을 완성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2012년 등단 후 정신없이 달려온 작가가 나빠진 몸 상태 탓에 작업을 잠시 쉬며 자신을 포함해 만성질환과 통증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돌아본 시기이기도 하다.

한참 몸이 안 좋을 때 그는 아픈 작가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었다. 에밀리 디킨슨,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그들이 어떤 병을 앓았는지, 통증은 어땠는지, 얼마나 살았는지, 그 와중에 책은 몇 권이나 썼는지 계속 찾아보았다.

“대단한 작가들도 몸이 아픈 와중에 최선을 다해 쓰고 책을 냈더라고요. ‘내가 뭐라고 나약해지나’ 싶고, 그 이야기와 삶에 위안을 받았어요. 작가들의 일화를 찾는 게 결국엔 이 소설을 쓰는 과정과 비슷했어요.”

‘치유의 빛’은 고통으로 가득한 소설이지만, 에필로그엔 지수와 중학생 시절 친구들이 웃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이 담겼다. 지수가 실제 경험한 것인지, 꿈꾼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소설의 결말은 죽음이 아닌 지속하는 삶을 향한다.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래도록. 그래. 아주아주 오래도록./응. 나는 아직 살아 있어./계속 살아 있을게.” 작가는 “에필로그를 쓸 때 가장 행복했고, 이 에필로그가 있기에 이 소설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모두 다 조금씩은 아프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읽은 분들께 그냥 괜찮다고, 계속 살아도 되고 우리 함께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등단 후 13여년간 일상의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면면을 고딕 호러라는 자신만의 올돌한 스타일로 이야기해온 그의 다음 행보는 어디로 향할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작가는 자신을 ‘늦게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뭔가를 알고 쓰는 사람이 아니라 소설을 쓰다가 알게 되고, 모르기 때문에 쓰기 시작하는 사람.

“(‘한국형 여성 고딕소설’ 작가라는) 명칭을 좋아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작품에 뚜렷한 지점이 보인다는 뜻이고, 이는 제가 의도한 바이기도 해요. 이런 지점을 포함해, 앞으로 계속 써나가면서 ‘나는 이런 작가였구나’를 알게 될 순간을 기대합니다. 목표는 단순합니다. 더 깊어지고 싶고, 소설을 제대로 쓰고 싶어요.”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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