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고등검사장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의 수사·기소권 분리를 비판하는 글을 검찰 내부망에 올렸다. 권순정 수원고검장(사법연수원 29기)이 23일 “수사-기소 분리가 무엇인지 냉철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형사사법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트로이의 목마’를 들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 고검장은 이날 검찰 내부망(이프로스)에 ‘검찰의 미래를 그려봅시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수사-기소 분리 주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개념이 모호하고 연원이 불분명해 참고할 만한 해외 자료를 찾기조차 어렵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뒤 검찰 구성원이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한 수사·기소 분리에 대한 입장을 내부망에 밝힌 건 처음이다.
권 고검장은 “검찰의 광범위한 직접 수사에 대해선 많은 국민들께서 우려하고 계신 게 사실”이라며 “검찰의 직접 수사개시를 제한하거나 절제토록 하는 의미의 수사-기소 분리라면 우리가 보다 전향적이고 건설적으로 논의에 참여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어 “검찰 등 다른 수사기관의 수사력이 점차 향상되고 있는 점, 검사들의 법률전문성을 다른 중요 직무에 투입할 수 있다는 점, 민생사건이 보다 신속하게 처리되도록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답을 찾아보자”며 “검찰이 경찰 수사에 초반부터 관여하며 긴밀하게 협력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한다면 상호 건전한 견제라는 이점도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 고검장은 “만약 수사-기소 분리가 검사의 수사를 일체 금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따라가는 사법작용 중 하나인 ‘소추’ 기능의 본질을 해치는 것이므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러한 수사-기소 분리는 진실을 규명하는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이 진실에 눈감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문명국 중 어디에서도 소추를 결정하는 기관이 사실확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나라는 없다”며 “소추 기능을 무력화하는 수사-기소 분리는 정의실현을 국가의 기본 책무로 삼고 있는 우리 헌법질서 안에서 용인될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권 고검장은 “수사는 소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기능”이라며 “수원고검이 최근 발간한 ‘재기수사명령 우수사례집(2019-2024)’에 법망을 피할 뻔했던 범죄자가 항고와 재기수사 과정을 거쳐 기소돼 실형이 확정된 사건 45건이 실려 있다”고 소개했다.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등 다른 법 집행기관들과의 협력과 절차적 정당성도 강조했다. 권 고검장은 “진짜 전문가들과 현장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 지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때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며 “고발인의 이의신청권이 왜 폐지돼야 하는지,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지 않나”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미 경찰이 피의자에게 불기소를 약속하며 거액의 돈을 받고, 버젓이 위증을 회유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여기서 더 망가져선 안 된다”며 “공개된 장소에서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심도 있는 토론과 심의를 진행해 먼 훗날 역사의 책임을 따져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소설 <1984>에는 모든 사회문제의 책임을 ‘임마누엘 골드스타인’이라는 한 사람에게 떠넘기는 장면이 나온다”며 “당연한 이야기지만 새 정부의 제도개선 작업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손쉽게 검찰 탓으로만 돌리고 마는 이런 ‘골드스타인 책임전가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그런 감정적인 선동이나 음모론, 보복감정으로는 제대로 된 해답을 낼 수 없다”며 “힘과 돈을 쥔 권력자라도 법 위에 있지 않고, 가진 게 없더라도 억울하게 처벌받지 않고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는 형사사법을 만들어 가기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권 고검장은 문재인 정부 당시에도 이른바 ‘검수완박’을 추진할 당시 “소추권자가 사실관계 확인을 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입법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권 고검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법무부 검찰국 국장을 지냈고 지난해 5월 수원고검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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