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일본에 빼앗겼던 옛 식민지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삼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은 이를 제국주의의 연장이라 보고 무장 항쟁에 나섰다. 1950년 프랑스군의 하이퐁 포격을 기점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베트민은 정면충돌을 피한 채 게릴라전을 펼쳤다. 도로를 끊고, 보급로를 공격하며, 기습 후 사라졌다. 피로에 빠진 프랑스군은 전쟁을 끝낼 결정적 전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무대로 선택된 곳은 디엔비엔푸였다.
디엔비엔푸는 라오스와 중국을 잇는 보급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랑스군은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를 압도적 화력으로 거대한 가마솥으로 만들어 베트민 정규군을 유인해 일거에 섬멸할 계획이었다.

프랑스는 육상 보급이 어려운 이곳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항공편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실어 나르며 요새화했다. 이곳은 가로 6㎞ 세로 20㎞에 이르는 광대한 분지로 1만2000명으로는 원형 방어가 불가능했다. 프랑스군은 중앙 활주로를 중심으로 8개 거점에 병력을 분산해 방어했다.
프랑스군의 결정적 패착은 베트민의 역량을 얕봤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프랑스는 험준한 산악 지형에 중포를 끌고 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올 5월 말 필자가 이곳을 직접 답사해 본 결과, 그 판단은 오판 아닌 오판이었다. 실제로 파딘 패스에서 디엔비엔푸 외곽 고지까지 약 90㎞ 구간은 해발 1200∼1400m의 산들이 겹겹이 이어지며, 당시로서는 차량은 물론 가축조차 접근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하지만 베트민은 이 구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포를 분해해 지게와 수레에 나눠 싣고, 하루 800m씩 석 달 가까이 한 발 한 발 옮겨왔다. 베트남인의 집념과 의지가 프랑스군의 현실적 판단을 오판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베트민 총사령관 보응우옌잡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화력의 열세를 인식하고 무리한 공격을 피했다. 대신 외곽부터 참호를 파고 포위망을 구축했으며, 밀림 깊숙한 지휘소에는 벙커까지 설치해 지구전과 소모전의 구도를 완성해 갔다.
베트민의 공격에 프랑스군 외곽 거점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활주로는 포병 사정권에 들며 마비됐고, 기상 악화 속 포격으로 공중보급마저 끊겼다. 병력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프랑스군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1954년 5월7일,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제국주의가 무너진 상징적 사건이었다. 강한 의지를 지닌 베트민은 프랑스군의 합리적 판단을 오판으로 바꾸며,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를 현실로 만들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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