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창고형 약국, 주말 방문객 몰려…일대 ‘교통마비’
약물 오남용 vs 선택 확대…약품 유통도 변화 바람?
감기약만 50여종…수면·진정 등 상담 필요 약품도

2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수정구 고등공공주택지구의 한 약국 매장. 토요일인 이날 매장 앞은 몰려드는 차량과 인파로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이곳은 국내 첫 ‘창고형 약국’을 표방하며 지난 11일 문을 열었다. 입소문을 타며 맞은 두 번째 주말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오는 젊은 부부와 부모님을 모시고 찾은 가족 단위 방문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눈에 띄었다.
분당·판교 신도시와 인접한 매장에 들어서자 ‘가방은 보관함에 맡겨주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고객을 맞았다. 열 지어 놓인 쇼핑카트와 흥겨운 장내 음악은 여느 마트와 다를 바 없었다. 아직 1층 약 460㎡(140평)만 매장으로 쓰고 2∼4층은 주차장으로 활용했다.
◆ 언론·약사 단체 관심에 오히려 ‘노이즈 효과’…흥행↑
천장마다 왼쪽은 ‘해열·소염&진통제·파스’, 오른쪽은 ‘관절·아미노산·비타민’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달려 있었다. 일반의약품부터 건강기능식품, 반려동물용 의약품 등 2500여개 품목을 창고처럼 쌓아두고 판매했다. 처방전을 받아 조제가 필요한 의약품은 아직 취급하지 않았다.

분류 품목은 50개가 조금 넘는다. 멀미약·마그네슘·모발·벌레·감기약·소화제·두뇌건강·혈액순환·의료용품·피부·동물영양제·동물용품 등으로 나누어 파스만 80종, 감기약만 50종에 달했다. 칫솔·구강세정제·염색약 등 잡화 품목까지 다양한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승강기에 붙은 안내문에는 △수면 △진정 △임산부 △비뇨기계 △피부질환용제 △소염제 △혈당 △다이어트 등 약사의 상담이 필요해 보이는 품목도 적혀 있었다.
매장 관계자는 “미국의 창고형 약국(드러그스토어)을 벤치마킹했다”며 “급격히 방문객이 늘어 직원을 계속 뽑고 있다. 하루 매출은 대외비”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약사 단체의 반발을 의식한 듯 “당분간 지점 확대 계획 등은 없다”고 덧붙였다.

개장 직후 평일 10여명에 불과했던 매장 체류객들은 폭증하고 있다. 이날도 계산대까지 100m 넘게 대기 줄이 늘어섰고, 매장 안에만 300명 안팎의 사람이 머물렀다. 이들은 스마트폰으로 방금 산 약품의 가격을 비교하기도 했다.
‘약물 오남용’과 ‘선택권 확대’를 놓고 논란이 커진 가운데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면서 일종의 ‘노이즈 효과’를 누리는 듯 보였다. 약사 단체가 창고형 약국의 확대를 경계하며 우려의 시선을 보내자 오히려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는 설명이다.

◆ 매장 입구에 “가방은 보관함에”…열 지어 놓인 카트
매장 측은 이곳 제품들이 인근 약국보다 대부분 싸지만, 일부 비싼 품목도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곳 운영자는 한때 대형 약국을 경영했던 약사로 알려졌다. 5층 사무 공간으로 올라가자 10여개의 책상만 놓인 채 온통 의약품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직원 외 출입을 금한다’며 폐쇄회로(CC)TV 촬영을 경고하는 안내판이 놓였다.
매장에선 약사가 약을 추천하는 기존 약국과 달리 상주 약사들이 매장을 돌며 고객을 응대했다. 반응은 다양했다.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는 50대 주부는 “어차피 편의점이나 온라인쇼핑몰에서 구매할 수 있는 영양제라면 직접 보고 같은 효능에 더 값싼 제품을 사고 싶어 남편과 방문했다”고 말했다.
반면 한 40대 남성은 “카트를 끌고 가지런히 진열된 매장을 돌다 보면 마치 대형마트처럼 이것저것 담게 된다”며 “매장 안에 상담을 위한 약사들이 배치됐지만 오늘처럼 붐비는 날에는 자세한 얘기를 나누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이 남성의 카트에는 비타민과 감기약, 진통제 등이 담겨있었다.

국내 첫 창고형 약국의 등장은 파문을 몰고 온 듯 보인다. 국내에선 약사가 아닌 사람은 약국을 개설할 수 없도록 했고, 그동안 미국의 CVS 같은 드러그스토어가 발을 붙이지 못했던 이유다. 올해 2월 다이소가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면서 약사들의 반발을 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 약사회는 부정적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박리다매’ 방식의 운영이 부실한 복약 지도와 과도한 의약품 쇼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약사회는 유통 질서를 해칠 수 있다며 전담팀을 꾸렸고 보건복지부에도 관련 민원이 접수됐다. 다만 복지부는 현행 약사법상 문제가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성남지역의 한 약사는 “세밀한 상담을 통해 오남용을 줄일 수 있는 여과기능이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해당 창고형 약국 측은 “시대 변화에 맞춰 유통과 판매 방식에도 변화를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코로나19 당시 ‘배달 전문 창고형 약국’…약사 단체 압박에 소멸
사실 ‘창고형 약국’이라는 이름이 이번에 처음 등장한 건 아니다.
제약업계에 따르면 국내에는 코로나19 확산 당시 ‘배달 전문 창고형 약국’이 존재했다.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가 허용되면서 약만 조제해 직접 배달해주는 약국들이 서울에만 4곳가량 문을 열었다. 하지만 약사 단체가 압박하며 줄줄이 문을 닫았고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배달 전문 창고형 약국은 사무실 형태를 갖추고 ‘약’이라는 간판만 단 채 영업했다. 시민들이 찾아가 처방전을 내밀어도 함부로 약을 짓지 않았다.

약사 단체에선 약물 오남용을 이유로 이런 창고형 약국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했고 징계 경고가 나왔다. 당시 약사 단체는 누가 어떻게 조제하는지 확인할 수 없고 오배송 사고, 변질 위험 등이 있다며 배달 전문 창고형 약국을 압박했다.
마트처럼 카트를 끌고 건강기능식품 등을 구매하는 ‘약국계의 코스트코’ 등장에 동네 약국들은 이미 초긴장한 상태다. 소비자 중심의 약국문화 도입일지, 약물 오남용을 부채질하는 것인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지만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초연결 사회’에서 약품 유통 역시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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