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동맹국도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으로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미 국방부는 19일 션 파넬 대변인 명의로 된 성명에서 “피트 헤그세스 장관이 오늘(18일 상원 청문회)과 샹그릴라 대화(지난달 31일)에서 밝힌 것과 같이 유럽 동맹들이 우리 동맹, 특히 아시아 동맹을 위한 글로벌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며 “그것은 GDP의 5%를 국방 분야에 지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 정부의 거듭된 메시지는 명확하다. 유럽보다 안보위협이 훨씬 큰 한국도 GDP 5%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희망 사항이라기보다는 압박이나 다름없다.
이제 국방예산 증액은 발등의 불이 됐다. 문제는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새 정부의 국방예산은 천정부지로 불어난다. 그만큼 다른 분야에 투입할 재원이 줄어든다. 국방기술진흥연구소의 ‘2024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한국 국방비 총액은 479억 달러(약 66조 원)로, GDP 대비 2.8% 수준이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37%)와 러시아(5.9%)를 제외하면, 국방예산 상위 10위 국가 중 한국보다 GDP 대비 비율이 높은 나라는 미국(3.4%)뿐이다. 미국이 요구하는 5% 수준으로 인상할 경우 국방예산은 무려 120조 원에 육박한다. 재정 여건을 고려할 때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관세협상으로 불똥이 튀는 것은 물론, 상식을 벗어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액을 꺼내 들고 몽니를 부릴 수도 있다. 이래저래 달갑지 않은 시나리오다.
5% 증액 가이드라인에 얽매이기보다 현실적인 인상률을 제시하며 ‘항목조정’ 등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도 3.5% 수준으로 국방예산을 올리고 나머지 1.5%는 항목조정을 통해 국방비로 편입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향후 미국이 중국 견제 차원에서 주한미군 규모와 역할을 축소·조정하면 한국군은 더 큰 대북 방위 책임을 지게 돼, 굳이 미국의 증액 요구가 아니더라도 국방비를 대폭 늘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현재 국내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국방비 5% 증액 요구는 무리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자칫 내정 간섭으로 비쳐 한국민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한·미 동맹 균열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미국 측에 전달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역발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국방비 증액이 불가피하다면 북핵대응역량을 확 키우고 방위산업도 약진시키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새 정부는 핵 작전 계획까지 포함한 한·미 확장 억제 전략을 수립하고 한국의 잠재적 핵 역량 구축, 핵 추진 잠수함 건조 지원 등도 검토해야 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일본과 나토회원국도 공조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나토정상회의가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데 핵심의제가 우크라이나전쟁과 국방비 5%대 증액문제라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나토 회의에 참석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대통령이 강조해 온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가 첫 시험대에 오를 공산이 크다. 새 정부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선 아쉽게 불발된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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