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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기억이여, 안녕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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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19 22:49:20 수정 : 2025-06-19 23: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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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오픈AI의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쓴 ‘부드러운 특이점’의 도입부를 읽다 문득 지난 4월 개봉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화성 특급’이 떠올랐다. 제레미 페렝 감독의 ‘화성 특급’은 23세기 화성의 수도 녹티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사설탐정 알린 루비(레아 드루케)에게는 파트너 카를로스 리베라(다니엘 은조 로베)가 있다. 5년 전 로봇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노비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한 카를로스는 기억을 로봇의 몸에 업데이트해 인간의 기억을 지닌 인공 존재다. 기술적으로는 백업 로봇이지만 그는 여느 인간처럼(혹은 올트먼이 가능성을 제시한 초지능처럼) 자율적으로 사고하며 판단을 내린다.

 

작중 세계에서 로봇은 인간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 수배 중인 해커 로버타 윌리엄스를 카를로스가 붙잡았을 때 해커는 그에게 ‘제7지침’을 외치며 팔을 놓으라고 명령하지만 카를로스는 이미 시스템 전원을 꺼버린 상태다. 그뿐 아니라 전처와 딸이 그리워지면 그는 언제든 옛 가족이 사는 곳으로 가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환영받지 못한다. 생전에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리베라는 이미 죽었지만 그의 기억을 지닌 백업 로봇은 전처에게 죽은 카를로스와 동일한 인물이나 다름없다. 카를로스와 똑 닮은 홀로그램 얼굴 때문이 아니라 기억으로 존재가 동일시된다는 점은 ‘화성 특급’을 다른 SF 영화들과 크게 가른다.

 

탈육화된 존재로서의 카를로스는 점차 인간과 로봇의 경계를 흐리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프로그래밍이 된 로봇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던 시절의 기억으로 알린을 애정하고 보호한다. 부드러운 특이점과 초지능이 등장한 미래 세계를 그려볼 수 있는 세밀한 설정이 모여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한 편의 영화로서 ‘화성 특급’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서사는 뇌 공학을 공부하는 여대생 준 초우의 실종을 수사하는 알린을 따라가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카를로스였다는 사실이 마지막에 드러난다.

 

새로운 업데이트로 모든 로봇을 장악한 S.A.P 프로그램은 구식 모델인 카를로스에게는 설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이를 잃고 난 뒤 그는 더 이상 화성에 머물 의미를 잃고 만다. 카를로스는 자신이 잃어버린 이의 환영을 본다. 기계 시스템의 혼선이 만든 오류가 아니라 그리움이 빚어낸 착각으로 카를로스의 홀로그램 얼굴에 두 줄기의 눈물이 쏟아진다. 로봇의 손으로 홀로그램 얼굴의 눈물을 닦아보려 하지만 기계의 물성으로 얼굴만 일그러질 뿐이다. 슬픔을 벗어날 길이 없어서인지 눈물을 닦을 수 없어 절망적인지 모를 이 장면은 마음에 깊이 박힌다. 카를로스는 스스로 물질로서의 로봇 신체를 떠나 기억-데이터를 기록 보관소에 저장하기로 선택한다. 마침내 로봇들의 기억-데이터는 섬광이 되어 빛의 실타래처럼 엉켜 우주 속으로 향한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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