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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의 붓끝서 조선 문화를 읽다

입력 : 2025-06-21 06:00:00 수정 : 2025-06-19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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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근 고통·자식 죽음·아내의 투병
조선 선비들 짧은 편지글 ‘간찰’ 모아
정여창·조광조·이항복 등 사연 망라
시대 상황·민초 삶·정신세계 오롯이
고문 해석 넘어 ‘삶의 이야기’로 승화

간찰, 붓길따라 인연따라/ 석한남/ 태학사/ 5만원

 

“저는 부모님을 모시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만, 굶어 죽은 이의 시체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장차 살아남는 사람이 없게 생겼으니, 더 말씀드려 무엇하겠습니까. 매일같이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목에 바늘이 걸린 것만 같습니다.”

1671년(현종 12년) 2월13일, 함경도관찰사 남구만은 아저씨뻘 되는 집안 어른께 답답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670년부터 기상이변에 전염병까지 번져 조선 백성들은 전대미문의 기근을 겪었다. 경술년(1670년)에 시작되어 신해년(1671년)까지 이어진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이다. 이 대기근으로 조선 전역에서 100만명 가까이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함경도에서는 메뚜기 떼가 출몰하여 구황작물까지 송두리째 먹어 치워 버린 탓에 백성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땅속에 장사 지내고 나니 목소리도 모습도 영원히 다시 대할 수 없어, 이 한 몸은 쓸쓸하고 만 가지 일은 아득하기만 하여 문을 닫고 홀로 누워 눈물만 흘릴 뿐이니, 또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1701년(숙종 27) 정월 12일 김창협은 생때같은 외아들을 가슴에 묻고 비통한 마음을 이렇게 썼다. 그의 아들 김숭겸은 비록 19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학문이 깊었고 수백 편의 시를 남긴 수재였다.

석한남/ 태학사/ 5만원

“아침에 창동으로부터 관아에 염병이 돌아 제 아내가 염병으로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놀랍고 걱정이 되는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 저는 원래 허약한 체질이며, 작년에 간신히 병치레하고도 지금도 이렇게 안위를 걱정해야 하므로 속을 끓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위(1620∼1660)는 1650년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부수찬, 이조좌랑,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가 1644년 4월21일 장인 이침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전염병이 크게 돌아 피해를 본 상황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연을 담은 간찰(簡札)의 사례들이다. 간찰은 조선시대의 서간문 혹은 짧은 편지글을 말한다. 주로 상류층 문인, 관료, 학자들 사이에서 오고 갔던 안부 인사와 학문교류 등을 담은 편지를 말한다. 종이가 귀한 시절에 대나무나 나뭇조각에 글을 써 소통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조선 선비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간찰에는 글씨 한 획에도 감정과 인격 정성이 배어 있고, 붓끝의 농담 하나에도 마음의 진폭이 실려 있다”고 설명한다. ‘동방명적’ 등 조선시대 간찰첩 6책과 내지. 더프리마아트센터 제공

‘간찰, 붓길따라 인연따라’는 조선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 정여창부터 고종 때 영의정 및 경복궁영건도감 도제조를 지낸 조두순 등 조선시대 이름난 선비 유학자 142인의 간찰을 모은 책이다. 조광조, 이황, 김장생, 이항복, 김상헌, 조경, 허목, 송시열, 남구만, 권상하, 김창협 등 당대를 풍미했던 쟁쟁한 선비 유학자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책의 구성은 간찰 원문 소개, 그에 대한 해석과 저자의 감상, 그 내용이 현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짜여 있다.

책에 따르면, 간찰은 선비들의 사생활과 가장 밀접한 까닭에 형식과 내용이 무척 다양하다. 자식이나 가까운 아랫사람에게 보내는 간찰의 글씨체는 제삼자가 읽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흘려 쓰기도 했다. 발신인이 상대방과 매우 친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름까지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름 두 글자만 쓰면 될 일을 ‘잘 아는 처지에 이름을 생략’한다는 의미로 ‘불명(不名)’이라고 굳이 두 글자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흠(欠)’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었다. ‘흠!’이나 ‘에헴!’이라는 의성어로써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내용이 담긴 간찰 끝에는 ‘병(丙)’이나 ‘정(丁)’을 써 놓기도 했는데, 병과 정은 오행(五行)의 ‘불 화(火)’에 해당하므로 읽은 후에 태워 버리라는 당부였다.

고문헌 연구가인 저자는 간찰을 단순히 역사적 유물로만 보지 않는다. 문인들의 간찰을 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당대 사람들의 삶, 사유, 관계를 재조명한다. 살아 있는 대화로, 살아 있는 예술로 읽어낸다.

책에 수록된 간찰들은 유명 미술 컬렉터 이상준 ㈜더프리마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다. 그의 수많은 소장품 중 조선시대 명필 간찰첩 6책에 수록된 142명의 간찰과 시고(詩稿·시를 적은 원고) 164편을 필자들의 생몰년 순으로 재구성했다. 이들 간찰은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저자는 간찰 속에 담긴 마음과 사유, 간찰을 쓴 이와 받은 이의 관계 맥락을 풍부하게 풀어냄으로써, 단순한 고문 해석을 넘어서 우리 삶의 이야기로 승화시킨다. 독자는 단지 옛 편지글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쓴 이의 마음과 시대적 배경까지 함께 느낄 수 있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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