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관계자들 ‘반발’…국내 게임 본산 ‘판교 밸리’에 영향?
성남시, 2021년부터 ‘게임힐링센터’ 운영…주체는 게임재단
성남시 “복지부 올해 ‘정신건강사업안내’ 참고해 공모 진행”
“중독 물질 규정 아냐”…고민 없는 단어 사용은 책임 물어야
‘한국의 실리콘 밸리’ 판교 밸리의 게임산업으로 먹고산다는 경기 성남시가 때아닌 ‘중독 논란’에 빠졌다. 게임을 ‘중독 물질’로 규정한 공모전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의 ‘정신건강사업’을 참고해 진행했다”는 공모전이 게임산업 종사자들의 집중적인 화살을 맞으며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성남 판교는 국내 게임 매출의 60%를 책임지는 게임 본산이다. 넥슨, 엔씨소프트, 카카오게임즈, 웹젠, 위메이드, 네오위즈, 스마일게이트 등 내로라하는 회사들이 밀집해 있다. 지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게임업체들을 위해 시는 해마다 게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 ‘게임 성지’에서 불거진 중독 논란…“퇴행적 시선”
발단은 이렇다. 최근 성남시중독관리통합센터 누리집에 올라온 인공지능(AI) 활용 중독예방콘텐츠 제작 공모전은 인터넷 게임을 알코올·마약·도박과 함께 4대 중독 물질로 규정했다. 이 공모전은 시가 주최하고, 산하 중독관리통합센터가 주관한다.
총상금 1200만원의 공모전에선 콘텐츠를 올릴 때마다 해시태그를 함께 넣어야 하는데 4대 중독 물질을 빠짐없이 써야 하는 방식 역시 논란을 부추겼다.
게임을 중독으로 취급하는 건 박근혜 정부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추진한 ‘중독법’의 잔재라는 비판도 나온다. 중독법은 결국 무위에 그치며 폐기됐는데, 당시 알코올·마약·도박과 함께 게임을 4대 중독 물질에 올렸다. 박근혜 정부 때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졸지에 마약업자와 같은 반열에 놓였다”며 박탈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궁훈 전 카카오·카카오게임즈 대표는 14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시대착오적 발상을 하는 공무원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남 전 대표는 “성남시는 만화책을 모아 화형식도 한번 하시라”며 “세금 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진다”고 날을 세웠다.
프로게이머 출신 황희두 노무현재단 이사도 같은 날 올린 글에서 “도대체 게임이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되물었다.
지난 21대 대선에서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의 복지 분야 공약에 ‘청소년기 사행성 게임 상담 제공’이란 내용이 포함됐다는 걸 지적한 논객도 있었다. 국민의힘 소속 신상진 성남시장과 김 전 후보가 막역한 사이라는 걸 꿰뚫은 것이다.
비판의 배경에는 성남시가 과거 추진하던 ‘e-스포츠전용경기장’ 조성 사업을 중단한 데 따른 게임업계의 불만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성남시는 관련 공모전 홍보 활동을 일시 중단하는 등 진화에 나섰다.
한때 ‘국가중독관리위원회’ 신설안에 포함됐던 ‘게임에 관한 과도한 개인적 욕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정답은 ‘과몰입’이다. 국내에선 아직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가 도입되지 않았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게임특별위원회 발족을 통해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국내 등재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 게임재단과 ‘힐링센터’ 운영…“개원 때는 중독·과몰입 혼용”
흥미로운 사실은 성남시가 2021년부터 분당구 정자동에 게임 과몰입 예방시설인 ‘성남게임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넥슨, 엔씨소프트 등 게임 대기업이 주축을 이룬 ‘게임문화재단’이 실질적 운영을 맡았다. 다만, 예산의 90%는 성남시가 책임진다. 게임문화재단의 지점 성격이 강한 이 센터에선 게임 과몰입 검사와 문화예술 치유 프로그램 등이 진행된다.
게임문화재단과 시는 2020년 10월 ‘건전 게임문화진흥과 게임산업 발전을 위한 업무협약’을 교환했다. 이후 센터를 조성한 두 기관은 게임 ‘중독’, ‘과몰입’이라는 표현을 혼용해 썼다. 게임 중독 검사, 게임 과몰입 치유 등이다. 4∼5년 전만 해도 두 단어가 혼용됐고, 게임업계도 크게 개의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지금도 예약을 거친 학생과 학부모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문 상담사 2명과 센터장, 행정직원 등 5명이 센터를 지키며 이들을 맞는다.
센터 관계자는 “이제는 중독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과몰입이라는 표현을 쓴다”며 “방문객 대부분은 초등학생 아이와 부모들이다. 과몰입이라는 게 초등학생들이 조절하기 쉽지 않으니 부모님과 함께 상담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과몰입의 형태가 워낙 다양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면서도 “저도 한때 게임에 몰입했지만 지금은 멀쩡해 질병으로 치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보건복지부와 문화체육부가 ‘중독’이란 표현을 두고 조율하는 등 민감한 부분이 많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성남시 역시 문제가 불거진 지 사흘 만인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복지부의 올해 ‘정신건강사업안내’에서 인터넷 게임을 알코올·마약·도박과 함께 중독 유형으로 명시해 이를 반영해 공모주제를 정했다”고 해명했다. 또 “시가 인터넷 게임을 중독 물질로 규정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가상현실(VR)과 가상화폐(Cyber coin)가 지배하는 21세기에 벌어진 때아닌 중독 논란은 이제 잦아드는 분위기다.
게임업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중독이란 단어를 큰 고민 없이 끄집어내 사용한 책임은 응당 져야겠으나, 온라인을 달궜던 논란이 이쯤에서 사그라들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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