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수사 성실히 임한다”는 명분
한달 전 흉기위협 불구 영장 기각
복면쓰고 가스관 타고 결국 범행
CCTV·스마트워치 조치 유명무실
스토킹 범죄 4년새 7배 넘게 급증
“영장심사때 보복위험 적극 반영을”
스토킹 범죄가 살인 등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스토킹 범죄는 재범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피해자 목숨까지 위협한다는 점에서 수사·사법 당국이 구속수사 등 피해자 보호 중심으로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구 성서경찰서는 14일 오후 10시45분 세종 조치원읍 노상에서 50대 여성을 살해한 혐의(살인)로 피의자 A(40대)씨를 체포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이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 10일 오전 3시30분쯤 대구 달서구 아파트 6층 가스 배관을 타고 침입해 자택에 머물고 있던 5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뒤 도주했다. A씨는 스토킹했던 피해자를 살해한 직후 지인 명의의 차를 타고 세종 부강면 야산으로 도주했다. 해당 차량에서는 그의 휴대전화가 발견됐다.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한 경찰은 A씨가 차량을 놔둔 채 택시를 이용해 부친 산소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 뒤 현금으로 요금을 내는 모습까지 파악했다. 경찰은 A씨 신용카드·휴대전화 사용 등을 살펴봤으나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가 모습을 감춘 지역은 그가 어린 시절 자랐던 곳으로 CCTV가 없는 시골길을 따라 도피한 것으로 보인다. A씨는 이날 검거된 후 경찰에 “숨어 지내다 심신이 지쳐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전날 산에서 내려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사건 발생 한 달 전에도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했다. 당시 출동한 경찰은 스토킹범죄처벌법위반 등의 혐의로 A씨를 체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검찰도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고 보고 영장을 청구했으나 대구지법에서 영장을 기각했다. A씨가 성실히 수사에 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은 피해 여성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주거지 출입구에는 안면 인식이 가능한 CCTV를 설치했다. 하지만 피해여성은 스마트워치를 자진 반납한 상태였고, A씨가 복면을 쓴 채 출입문이 아닌 가스 배관을 타고 아파트로 무단 침입하는 바람에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목숨을 잃었다.
최근 스토킹이 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잦아지면서 심각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스토킹 가해자의 살해 사건이 피해자만 바뀌며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 지난달 12일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에서는 전 연인인 30대 여성을 스토킹하던 30대 남성 B씨가 전 연인을 납치해 흉기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피해자 역시 구속 수사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경북 구미시에선 서동하(35)가 스토킹하던 헤어진 연인이 경찰에 자신을 신고하자 살해하고 피해자 어머니까지 해치려다 미수에 그쳤다.

스토킹 범죄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4513건이던 스토킹 신고 건수는 지난해 3만1947건으로 7배 넘게 늘었다. 스토킹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전문시설 보호, 임시숙소 제공, 신변경호, CCTV 설치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경찰 신고에도 가해자가 버젓이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구속영장 관련 법제 개선과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감시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여성가족부 여성폭력방지위원을 지낸 서혜진 변호사는 “지금은 ‘모 아니면 도’처럼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가해자가 완전히 자유롭다”며 “형사소송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도 법원이 제한을 거는 식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염건웅 유원대 교수(경찰소방행정학)는 “영장실질심사에서 보복 위험성과 재범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며 “구속 수사를 하게 된다면 보복 범죄를 막는 데 경찰 부담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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