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샤일록에 매수 당한 재판장
작품 속 법은 돈 있는 자의 칼일 뿐
민중의 힘으로 법 정의 다시 세워
서사 재해석… 고전의 동시대성 강화
국악장단에 전자음 등 현대악기 교차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도 잘 살려
국립창극단이 ‘베니스의 상인들’이란 또 하나의 레퍼토리를 완성했다. 2023년 초연 당시부터 인기였던 작품이 더 세련되고 깊어진 재연 무대로 돌아와 매진행진을 이어갔다.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남긴 원작 제목은 ‘베니스의 상인’. 이를 극작가 김은성이 ‘베니스의 상인들’로 바꾸면서 극중 중심 구도를 확장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대 상인 안토니오 간 대결이 지중해 재벌 샤일록 대 베니스 상인 조합 갈등으로 탈바꿈했다. ‘달나라연속극(유리동물원)’, ‘순우삼촌(바냐아저씨)’, ‘뻘(갈매기)’, ‘함익(햄릿)’ 등 고전 재창작을 통해 당대 사회를 조망해온 작가의 선택이다.

유대인에 대한 극심한 혐오가 지배하던 시대 쓰여진 원작은 지금 시각에선 샤일록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혼동될 정도다. 끊임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멸시당하고 압박받다가 끝내 기독교인에게 딸을 빼앗기고 강제 개종 신세에 처해진다. 이 때문에 1973년 샤일록을 연기한 영국 대배우 로렌스 올리비에 이래 우리나라 오현경(2010), 정의신(2014), 이민기(2022) 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무대에서 샤일록 해석은 다양했다.
‘베니스의 상인들’은 과감한 서사 재해석으로 고전의 동시대성을 강화했다. 종교·인종 문제는 도려내고 샤일록을 지중해에 군림하는 재벌로 재탄생시켰다. 망가진 법 체계도 중요한 변화다. 유대인과 샤일록에게 부정적이고 안토니오에게 호의적이었던 원작 속 재판장과 달리 이 작품 속 재판장은 재벌 샤일록에 매수돼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다.
“정부도 법원도 이미 우리 편… 법대로만 하자는 것. 되게 해 무조건 되게 해”라는 샤일록 말대로 망가진 사법체계를 향한 작가의 날선 시선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작품 속에서 법은 돈있는 자의 칼일 따름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피를 흘리지 말고 살만 도려내라”는 변칙 변론이 사건을 해결하지만 재판장이 매수된 이번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 작금의 세태처럼 사법체계가 오류를 일으키거나 불신상태인데 끝까지 인명 구조를 포기하지 않는 민중의 노력이 결국 법 정의를 다시 세운다.
샤일록 역시 딸에 대한 애정, 유대인으로서 평생 받은 멸시에 대한 복수심과 반감 등은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99개를 가지고도 1개를 뺏어 100개를 채우려는 순수한 악인일 따름이다. 극 내내 감정을 절제하다 마지막 순간에야 반성하는 대신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다시 또 태어나서 만세 영화 누리리라”며 독기를 내뿜는데 국립창극단 간판배우 김준수가 노래와 연기로 명불허전을 입증한다.
극작 외에도 이성열 연출을 중심으로, 작곡가 원일, 작창 한승석, 음악감독 한웅원, 무대감독 이태섭 등 각 분야 최고 창작진이 협업해 완성한 무대는 창극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양껏 보여준다. 원일의 음악은 바닷바람처럼 시원하게 밀려온다. 국악 장단에 마림바, 아이리시 휘슬, 전자음 등 현대 악기를 교차시키며 지중해 무역항 베니스의 생동을 표현해낸다.

한승석의 작창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언어유희를 한국어로 절묘하게 옮겨내며, 절박한 장면에선 장중함을, 익살스러운 장면에선 웃음을 유도한다. 거대한 범선의 출항으로 마무리되는 이태섭의 무대 역시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최대한의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는 경지에 도달해있다.
모든 배우가 고른 역량으로 무대를 빛내는데 포샤 역을 맡은 민은경의 존재감이 가장 뚜렷하다. 귀여운 상속녀에서 극중 남장을 하고 법정에 나타나 위기의 남성들을 구원하는 법정 투쟁의 전략가로서 생동감 있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준다. 국립창극단 레퍼토리로서 ‘베니스의 상인들’이 남긴 아쉬움은 줄지어 선 관객 숫자에 비해 8일에 그친 공연기간(7∼14일)이다. 만국인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인 만큼 더 큰 무대에서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K콘텐츠 대표작으로 앞세워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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