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플로리안 수도원 대성당서
음악의 꿈 키우며 대가로 성장
죽어서도 오르간 음향과 함께해
린츠에 있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을 떠올릴 때면, 내 머릿속에는 늘 오르간 아래 잠든 브루크너의 모습이 그려진다. 수도원의 역사나 건축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의 음악이고, 그 음악을 남긴 작곡가가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단지 아름다운 수도원이 아니다. 열세 살의 브루크너가 소년성가대원으로 처음 음악과 만났던 장소이며, 성인이 되어서는 직접 소년성가대를 가르쳤던 곳이다. 그의 삶과 음악이 처음으로 깊게 뿌리내린 곳이기도 하다.
브루크너는 죽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생전에 유언처럼 말했다. 자신의 무덤을 수도원 대성당의 오르간 아래에 두어달라고.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단순한 감동을 넘어 깊은 울림을 느꼈다. 언젠가 반드시 이곳에 가서 그 무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린츠 자체도 브루크너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그는 빈의 대작곡가라기보다는, 린츠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이 도시의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작곡을 공부했고, 자신만의 음악 언어를 만들어나갔다. 그래서 오늘날 린츠는 ‘브루크너의 도시’로 불린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있고, 브루크너 하우스라는 콘서트홀에서는 매년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이 도시의 풍경은 그가 걸었던 길이고, 그가 처음 음악을 발견한 장소다.
마침내 브루크너가 잠든 곳으로 향하기로 한 아침, 린츠 시내 작은 꽃집에서 노란 장미 한 송이를 샀다. 이번 여행에서 그를 만나러 간다면 꼭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다.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을 때 느꼈던 전율,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음악이 준 감동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꽃 한 송이를 든 채, 나는 브루크너를 향해 길을 나섰다. 오스트리아 북부의 들판을 따라 버스로 약 30분. 창밖 풍경은 점점 고요해졌고, 그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그 압도적인 크기와 침묵에 놀랐다. 회색빛 벽과 붉은 지붕, 넓은 광장과 질서 정연하게 놓인 무덤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 가까이 솟아오른 수천 개의 파이프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바로 그 유명한 ‘브루크너 오르간’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오르간으로 알려진 이 악기 앞에서 브루크너는 수많은 미사를 직접 연주했고 음악과 신앙 사이에서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갔다. 그 앞에 서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마치 그가 이 공간에 앉아 연주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오르간 아래 위치한 지하 납골당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을 향해 걸었다. 그의 무덤은 바로 오르간 아래에 있다. 브루크너는 평생 오르간과 함께 했고, 그 장엄한 울림이 자신의 음악과 신앙을 대변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안식처를 오르간 아래로 택했다. 죽어서도 오르간의 음향 속에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계단은 서늘했고, 돌벽을 타고 스며드는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소리는 점점 사라지고 걸음은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도착한 지하에는 꾸밈없는 석관 하나가 있었다. ‘Anton Bruckner’라고 새겨진 검은 관. 그의 마지막 흔적. 나는 린츠에서 사 온 노란 장미를 조심스럽게 관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하나의 음악이 떠올랐다. 휴대폰으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의 2악장을 재생했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음악은 침묵으로 가득한 지하 공간에 은은하게 퍼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당신의 교향곡은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어요.’
수도원을 나서기 전, 나는 다시 한번 오르간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려고 오랫동안 쳐다봤다. 앞으로 다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면 아마 나는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어두운 지하와 차가운 돌계단, 그리고 조용히 올려놓았던 노란 장미 한 송이. 이 방문은 어떤 결말이라기보다는 나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앞으로 브루크너의 음악이 흐를 때마다, 이 고요한 공간을 떠올리고, 그 아래 잠든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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