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종학씨 아들 “기쁘고 감사”
국방부, 故 이영이씨 등 24명 서훈
죽은 척하며 땅바닥에 바짝 붙어 누워 있었다. 그때 한 젊은 인민군이 다가와서 총을 겨눴다. 확인 사살을 하려는 듯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알은 피부를 뚫고 몸에 그대로 박혔다. 한 발, 두 발, 세 발…. 모두 6발의 총알을 받아야 했다.
6·25전쟁 당시 겪었던 악몽 같은 순간을 떠올리며, 곤히 주무시던 아버지는 자주 잠꼬대를 했다. 항상 같은 내용이었다. 악몽을 꾼 뒤 부스스 일어난 아버지는 총을 맞았던 팔다리가 쑤시다며 인상을 찌푸리곤 했다. 휴전 직전 벌어진 전투에서 우측 팔과 다리, 귀 등에 6발의 총상을 입었던 아버지는 잠잘 때조차 전쟁을 떠올리며 마음도 함께 다쳤던 것이다.

아들 이용호(67)씨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들 용호씨는 아버지가 전쟁 당시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를 앞에 앉혀 놓고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매일같이 얘기해도 당신이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격작전 중 유명을 달리한 부대원들에게 미안하다며 자신의 공로를 숨기려 했다.
아들에게조차 자세히 알리지 않았던 아버지 이종학 용사의 공적은 75년이 지나서야 인정받았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이종학 용사의 일상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부터 말 그대로 전쟁터가 됐다. 정식군인이 아니었던 그는 1951년 2월 27세에 제자들과 함께 학도의용대를 만들어 반공활동을 하다가 미8240부대 예하 동키11부대 부대장을 맡았다. 학생을 가르치던 그가 사람들을 총으로 쏴야 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터를 누볐다. 이종학 용사는 유격작전을 지휘해 같은 해 4월 옹진군 교정면에서 북한군을 기습했다. 그가 이끈 동키11부대는 적 17명을 사살하고 피란민 1200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방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11일 이종학 용사 등 6·25전쟁에 참전한 비정규군 공로자 24명에게 무공훈장을 서훈했다. 무공훈장은 전시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여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용호씨는 이날 서훈식에서 “이제라도 아버지가 공적을 인정받아 무공수훈을 받게 돼 기쁘고 감사하다”며 웃음을 지었다.
또 적 20여명을 사살하고 9명을 생포한 고 이영이 8240부대 예하 울팩1부대 대대장, 적 14명을 사살하고 통신시설 등 적 중요시설을 파괴한 고 최제부 영도유격대 함경남도 지역 사령관도 훈장을 받았다. 국방부는 6·25전쟁에 참전해 공적을 세웠지만 서훈하지 못한 참전용사에게 추가로 훈장을 주는 제도를 15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누락돼서 서훈이 이뤄지지 못했다가 추가로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는 340명이다.
올해는 미8240부대나 영도유격대 등에서 유격작전 중 전투무공을 세운 용사가 대상이다. 22명은 8240부대, 2명은 영도유격대 소속이다. 이들은 ‘6·25 비정규군 보상법’에 따라 공로자로 인정받았지만 무공수훈은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유공자가 대부분 전사해 가족이 훈장을 대신 받았다. 이들처럼 공을 세운 비정규군 2만여명 중 4000여명만이 공로금을 신청했다. 국방부는 나머지 1만6000명을 찾아 보상금 신청을 안내할 계획이다.
김선호 국방부장관 직무대행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적 지역에 침투해 유격작전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비정규군 무공수훈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우리 국민 모두에게 나라의 위기에 애국, 헌신하신 분들이 ‘국가의 영웅’임을 알게 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관련 정책을 적극적으로 살피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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