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 거주 특화 ‘교남시냇가’
의료형 침대서 머리 감고 재활 운동
‘영락애니아의집’은 이송 장치 설치
거동 힘든 장애인 안전·편의성 증대
‘다니엘복지원’ 거주인 개별 공간 보장
거주시설 환경개선 통해 만족도 증가
인권·사생활 보호… 거주인 다툼 줄어
위생관리·전염병 예방에도 큰 도움
장애인 지원·주거 선택권 확대 필요
“국가 차원 돌봄 책임제 실현 나서야” 끝>
“머리 개운하게 감겨드릴게요.”

지난달 14일 오전 경기 파주의 장애인거주시설 ‘교남시냇가’ 1층 생활실. 한 생활지도원이 중증장애인 A씨의 머리를 감겨주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며 와병 생활을 하는 A씨를 굳이 목욕실로 옮길 필요가 없다. 거주인이 누운 침대는 ‘의료형 침대’로, 베개를 치우자 머리맡에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보였다. 생활지도원은 샤워기 물을 틀어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물은 화장실로 연결된 관을 통해 빠져나갔다. A씨는 원래 누워 있던 자리에서 온수를 느끼며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교남시냇가는 ‘특화’시설이다. 거주인 29명이 생활하고 있는데, 모두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40∼60대 ‘중고령’ 중증장애인들이다. 이들을 위해 접이식 의료형 침대가 설치돼 머리 감기는 물론 재활 운동도 가능하다. 강서구 소관의 관외 시설인 교남시냇가는 지난해 서울시의 거주시설 환경개선 사업 지원을 받아 중고령 중증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수민 교남시냇가 사무국장은 “노인성 질환이 심해 도움 없이는 살기 힘든 장애인들이다”며 “돌봄을 비롯해 집중적인 의료 지원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의료 장비 등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의 장애인거주시설 ‘영락애니아의집’에 들어서자 마치 병원처럼 특수기기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혼자 거동할 수 없는 뇌병변 장애인과 중복장애인 30명이 생활한다. 의료 지원을 위해 산소 발생기부터 약물을 주입하는 ‘피딩 펌프’ 등도 준비됐다. 천장에는 주행형 이송장치가 레일을 따라 설치돼 생활지도원이 거주인을 직접 안고 옮길 필요가 없다. 그동안 4∼5명이 한방에서 지냈던 생활실도 최근 2∼3인용으로 리모델링했다. 특히 지하에는 게스트하우스가 마련돼 방문한 가족이 직접 거주인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조지영 시설장은 “전문 기기들이 있어 거주인을 위한 맞춤형 지원을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생활지도원의 편의성과 안전도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시설 다양화·선진화 필요”
전국 장애인 거주시설들이 정부의 부족한 지원 속에 거주인과 종사자 모두 고통을 받는 가운데, 리모델링에 성공한 시설처럼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충분한 인력 충원 속에 시설에 대한 다양화, 전문화, 선진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역사회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장애인들을 위한 지원도 확대하고, 다양한 주거 선택권을 보장하면서 ‘국가 돌봄 책임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현아 장애인거주시설이용자부모회 대표는 9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거주시설은 장애인과 가족들의 버팀목”이라면서 “시설이 선진화되고, 인력이 보장되면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학대 등 인권 침해 예방과 관련해서도 “시설이 거주인들을 위한 쾌적하고 개별화된 환경을 지원한다면 학대도 자연스레 예방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종사자 인력 배치기준도 상향해야 한다”고 했다. 단체 측은 최근 조규홍 복지부 장관을 만나 이런 내용이 담긴 요구안도 전달했다.

◆개별형 공간…“믿고 맡겨”
지자체 예산으로 선진화에 투자한 거주시설의 경우 거주인과 가족 모두 만족도가 높다.
서울 서초구 거주시설인 ‘다니엘복지원’은 총 7억원을 투입해 3층 생활공간을 ‘집단 거주형’이 아닌 ‘개별형’으로 탈바꿈했다.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4인실 4곳으로 약 20명이 생활하던 공간이 2인실 7곳과 1인실 5곳으로 바뀌었다. 화장실도 대폭 늘려 총 7개가 설치됐다.
이곳에는 직업 재활 공간도 있어 장애인의 경제적 활동을 통한 지역 자립도 돕고 있다. 지승현 다니엘복지원 원장은 “개별 공간을 보장하면서 인권과 사생활 보호에 효과적이다. 매일 다투던 거주인들이 요즘에는 잘 싸우지 않는다”며 “위생관리와 전염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자립을 준비하거나 시설에 머무는 장애인들도 좋은 환경에 있어야 하는 권리가 있다”며 “거주시설 환경개선을 위해 정부도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15년 전 아들이 다니엘복지원에 입소한 50대 황순석씨는 시설 덕분에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아들이 시설에 들어갈 무렵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며 “빚도 있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건설현장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면서 할머니 밑에서 자라던 딸에게 돈을 보내곤 했다. 아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수년간의 탈시설 논쟁 속에 정부는 시설에 대한 지원을 사실상 ‘인건비 보조’에 머물고 있다. 시설 환경을 개선하는 ‘기능보강사업’은 지지부진하다. 조 시설장은 “10년 동안 기능 보강을 위한 지원금으로 설치한 건 대피용 미끄럼틀뿐”이라면서 “안전에만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환경개선과는 거리가 멀다”고 토로했다. 김광식 경기도장애인복지시설협회 회장은 “시설 선진화를 이루는 기능보강 지원을 통해 고품질 서비스를 갖출 필요가 있다”며 “지금보다 더 많은 거주인이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립 성공한 경인씨 “실패·성공 겪는 삶”
시설 개선과 함께 지역사회 자립을 위한 지원도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장애 정도가 경증인 이들에 더해 중증장애인까지 수요를 파악한 뒤 자립 시도가 이뤄지고 있으나 이들을 위한 지원책도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다.
박경인(30)씨는 태어나서부터 시설에서 살다 24살에 자립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버티기’였다.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아 보일러를 트는 것도, 수도·전기요금을 내는 것도 어려웠다. 심지어 양극성 장애로 정신병원에도 입원했던 그는 퇴원 이후 4개월 동안 활동보조인을 지원받지도 못했다. 결국 발달장애인 인권단체 피플퍼스트의 도움을 받은 그는 지역사회에 적응하며 활동가로도 일하면서 자립에 성공했다.
박씨는 “많은 발달장애인이 활동보조사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루에 3시간 정도 도움받는 게 대다수다. 활동보조를 받는 시간과 인력이 늘어나야 한다”고 했다. 자립지원주택에 홀로 머무는 그는 “나만의 사적 공간이 있어 행복하다”며 “동네에서 이웃들과 지내는 것도 좋다. 함께 살아가며 실패도, 성공도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돼 기쁘다”고 웃었다.
송효정 피플퍼스트 사무국장은 “지역 자립을 위한 인프라를 확대하고, 지자체와 정부가 서비스를 연계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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