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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언덕 위의 묵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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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6-09 23:08:55 수정 : 2025-06-10 1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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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언덕배기에 ‘이회영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고 회자되는 이회영 선생과 동지들의 활동을 기리고자 서울시에서 마련한 집이다.

이회영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이 집은 2층 돌집인데 20세기 초 미국 남 감리회 선교사 주택이었다. 이회영기념관에서는 이 집을 ‘사직동 묵은 집’이라 부르고 있다. 사직동에 있는 오래된 집이란 뜻이다. 마당이 넓고 전망이 좋아 처음 오는 사람들은 ‘서울 도심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고 놀란다. 마당에는 수령이 백년은 족히 넘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고 이외에도 감나무와 앵두나무, 분꽃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기린초, 민들레, 비비추 등 각양각색의 풀이 많아 마당을 거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에는 본래 똑같이 생긴 돌집이 세 채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한 채가 없어져 두 채만 남아 있었고 그중 한 채를 이회영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부근에는 영국인 언론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한국명 배설, 裵說)의 집터와 미국인 기업가이자 언론인으로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집 딜쿠샤가 있으니 이회영기념관이 이 동네에 썩 잘 어울린다. 베델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1909년 급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의 침략과 이에 맞선 한국인의 저항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동시에 한국인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힘썼다. 테일러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국제사회에 알렸고 1923년 자신의 보금자리로 딜쿠샤를 지어 1942년 일본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부인과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당시 미국의 선교활동을 살펴보면 북 감리회는 정동 언덕에, 남 감리회는 사직동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정동 일대는 미국 공사관이 있던 곳으로 미국인들이 모여 살았고 1885년 배재학당, 1886년 이화학당, 1887년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사직동 일대에는 1898년 배화학교, 20세기 초 남 감리회 소속 선교사 주택이 세워졌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그런데 이들은 왜 서울의 서쪽 언덕에 자리 잡았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병리학적 고려, 즉 조선의 풍토병을 경계한 때문이다. 1891년 서울에 도착한 후, 이듬해부터 평양에서 활동했던 캐나다인 의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은 말라리아에 걸려 1894년 사망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울은 여름철에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지역이었다. 특히 한강과 청계천 인근 저지대에는 늪지대와 고인 물이 많아 모기가 많았고 위생 상태도 열악했다. 서양인들은 특히 이 지역의 기후와 위생환경에 취약해 ‘서울의 낮은 지역은 병들기 쉽다’고 인식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연희전문의 언더우드, 이화학당을 운영한 스크랜턴 등 서울에 도착한 초기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위생, 물, 병원균 문제를 언급하며 ‘언덕 위로 옮겨야겠다’는 의사를 밝히곤 했다.

요즘 상식으로는 아프리카 여행 전에 접종하는 것이 말라리아 예방주사라고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말라리아가 발생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말라리아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당시 말라리아는 학질(?疾) 또는 학(?)이라 불렸으며 주기적인 오한과 발열, 발한을 특징으로 하는 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악기(惡氣)와 사기(邪氣) 등 나쁜 기운에 의해 생긴다고 인식되고 있었고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은 몰랐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 2년(1420) 음력 7월 대비였던 원경왕후가 학질에 걸려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양녕대군이 학질에 걸렸다. 이후 고종 대까지 조선시대 내내 학질에 대한 기록이 수없이 많다. 1920년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말라리아 환자는 총 6만5227명(조선인 5만9013명, 일본인 6107명)이었으며 사망자는 총 3729명(조선인 3691명, 일본인 38명)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미국과 유럽에서도 말라리아는 흔한 풍토병이었다. 말라리아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히포크라테스도 말라리아와 유사한 주기성 발열을 기록했다. ‘말라리아(mal-aria)’라는 단어 자체가 이탈리아어 ‘나쁜 공기’에서 유래했고 로마와 근교 저지대에서는 심각한 유행병이었다. 영국에서는 ‘에이규(ague)’라 불렸으며 런던의 템스강 하구를 중심으로 습지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조지아 등 남부 지역과 습지대에서 널리 퍼졌고, 19세기에는 워싱턴 디씨도 말라리아 유행지로 악명이 높았다. 서양인들은 말라리아가 나쁜 공기에 의한 것으로 인식했고 모기에 의해 감염된다는 사실은 20세기가 되고서야 알았다. 당시 서양 의학에 따르면 고지대는 통풍이 잘되고 습기가 적어 병에 걸릴 위험이 낮다고 생각했기에 서양인들은 주로 정동과 사직동 언덕을 선호했다. 당시 서울의 지리를 동서남북으로 살펴보면 지대가 높고 도심과 가까운 곳은 정동 일대와 인왕산 자락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일본의 강압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0년 되는 해이다. 세월이 돌고 돌아 올해가 또다시 을사년이니 ‘육십갑자(六十甲子)’라 하여 60년을 주기로 하는 조선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두 바퀴가 돈 셈이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겨 주권국가의 지위를 잃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을 생각하면 지금 언덕 위의 집 이회영기념관을 찾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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