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토스카나 전설’ 안드레아 프란게티/1992년 황무지 산에 포도밭 일궈 테누타 디 트리노로 설립/7년만에 로버트 파커 ‘올해 와인 인물’로 선정/ 토양 분석 통해 카베르네 프랑 성공 직감/3개 싱글빈야드 와인 ‘이 캄피’ 탄생

코르크를 열자마자 확연하게 느껴지는 말린 체리향과 허브. 시간이 지나면서 더해지는 흙향과 가죽냄새. 잔을 흔들자 피어오르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향까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아로마가 비강을 파고드니 순간 정신이 아찔합니다. ‘토스카나의 전설’ 안드레아 프란게티(Andrea Franchetti)의 와인은 그 깊이가 남다르네요. 테누타 디 트리노로(Tenuta di Trinoro)의 세컨드 와인 레 쿠풀레(Le Cupole). 누구에게나 ‘인생 와인’이 있습니다. 잘 숙성된 레 쿠풀레는 그런 와인입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잠자던 미각세포를 모두 일깨워, 맛있는 와인을 찾아 떠나는 먼 여행길 초입에서 망설이던 이를 ‘와인의 바다’의 풍덩 빠뜨려 버리고 맙니다.

◆누구에게 인생 와인이 있다
레 쿠풀레 IGT 로쏘 토스카나(IGT Rosso Toscana) 2021은 메를로 56%, 카베르네 프랑 26%, 카베르네 소비뇽 11%, 쁘띠 베르도 7%를 섞은 슈퍼 투스칸입니다. 그런데 기존 수퍼투스칸과 결이 다릅니다.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산지오베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보르도 품종으로만 만듭니다. 블랙베리, 블랙체리 등 잘 익은 검은 과일로 시작해 블랙커런트,약간의 블러드 오렌지향, 말린 체리가 더해지고 꽃향, 시나몬, 달콤한 라벤더향, 구운 허브가 더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신료, 흙, 가죽, 담배, 발사믹 노트 등 잘 숙성된 와인에서 느껴지는 3차향이 또렷하게 올라오고 미네랄과 초콜릿 등 강렬한 향들이 끝도 없이 피어납니다. 깔끔한 탄닌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복합미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하고 1~3년 사용한 바리크에서 8개월, 시멘트 탱크 11개월에서 숙성합니다. 한해 생산량은 약 10만병입니다. 정열적인 붉은색 바탕에 와이너리 상징인 백조를 그려 넣은 레이블만큼이 나 강렬한 레 쿠풀레는 테누타 디 트리노로를 일군 안드레아 프란게티의 플래그십 와인 테누타 디 트리노로의 세컨드 와인으로 1995년 첫 선을 보였습니다. 왕관 위에 백조가 앉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와이너리 로고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안드레아의 집념이 잘 느껴집니다. 테누타 디 트리노로 와인은 금양인터내셔날이 수입합니다.

◆예술·자유 사랑한 토스카나 와인 전설
1949년 미국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란 프란게티는 미국의 유명한 추상화가인 삼촌 사이 트웜블리(Cy Twombly)의 영향으로 창의적인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18살에 자전거로 아프가니스탄까지 여행할 정도로 모험을 좋아했고 1960년대에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풍부한 예술적 감성을 쌓게 됩니다. 이탈리아 로마와 레 마르케(Le Marche)에서 레스토랑도 운영한 그는 1980년대 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이탈리아 와인을 수입하는 사업을 시작하다 1992년 토스카나 여행중 토스카나 발 도르차(Val d'Orcia) 마을의 폐허가 된 농장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와인 생산에 뛰어듭니다.


당시 발 도르차는 포도밭이 거의 없는 그냥 산림이었습니다. 이에 주변 농부들은 안드레아를 무모한 도전에 나선 미친 사람이라고 여겼답니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적당한 점토와 모래가 섞인 토양이 보르도 우안과 거의 흡사하다고 판단, 인생을 건 모험에 나섭니다. 그는 보르도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해발고도 450~600m의 고지대에 카베르네 프랑을 위주로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쁘띠 베르도 등 보르도 품종을 심어 완벽한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미친 짓이라 여긴 그의 도전은 짧은 시간에 전 세계 와인 전문가들의 입맛을 홀리게 됩니다. 특히 와이너리 설립 불과 7년만인 1999년 로버트 파커가 안드레아를 ‘올해의 와인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랍니다. 전통을 거부한 실험과 도전 정신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강렬한 레드 와인을 선보인 덕분입니다. 매년 기후와 포도 품질에 따라 블렌딩 비율이 확연하게 달라질 정도로 레시피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와인 메이킹은 자유, 그 자체입니다.


플래그십 와인, 테누타 디 트리노로가 그런 와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쁘띠 베르도 등 다양한 보르도 품종을 블렌딩하는 이 와인은 매년 가장 뛰어난 품종을 중심으로 블렌딩해 빈티지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가장 최근 빈티지인 2021은 메를로 60%, 카베르네 프랑 40%이입니다. 반면 앞선 2020은 카베르네 프랑 92%, 메를로 8%로 블렌딩 비율이 크게 차이납니다. 2021은 8590병만, 2020는 6000병만 생산됐습니다.

블랙체리와 블랙베리 등 잘 익은 검은 과일향이 지배하며 온도가 오르면 농익은 블랙베리 콩피, 대황, 달큰한 흙내음, 구운 향신료, 쌉쌀한 허브향, 꽃향, 바이올렛향과 깊은 숲속의 젖은 흙, 흑연, 담배, 발사믹 등 겹겹이 쌓은 아로마가 하나씩 풀어 헤쳐집니다. 메를로는 강렬한 집중도와 놀라운 지속력을 바탕으로 당당한 풍미를 보여주며, 카베르네 프랑은 신선하고 생동감 있는 산미로 전체를 조화롭게 완성시킵니다. 알코올 도수가 15.5%로 높지만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밸런스가 돋보입니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 뒤 프렌치 바리크에서 8개월 , 콘크리트 탱크에서 12개월 숙성합니다. 테누타 디 트리노로는 포도밭의 50개 마이크로 파셀중 최고의 4~5개 파셀만 선정해 만들며 나머지는 레 쿠풀레에 사용된답니다. 테누타 디 느리노로가 보르도 우안 생테밀리옹에서 카베르네 프랑 위주로 만드는 세계 최고의 와인 샤토 슈발블랑(Chateau Cheval Blanc)에 빚대 ‘이탈리아 슈발블랑’으로 불리게 된 이유랍니다.


◆전설의 대를 잇다
안드레아 프란게티는 2021년 12월 5일 로마에 있는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지금은 그의 아들 벤자민 프란게티(Benjamin Franchetti)가 와이너리를 이어받아 전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벤자민은 엔지니어링 전공 박사로, 밀라노 스마트팜 기업 아그리콜라 모데나(Agricola Moderna)의 설립자이자 엔지니어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업공학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답게 토스카나의 기후 변화에 맞춰 토지 전체의 토양을 지도로 만들고 분석해 20ha 포도밭을 50개 마이크로 파셀(Micro Parcel)로 나눠 빈티지 특성을 보다 세밀하고 완벽하게 담아냅니다. 아티스트 감성을 지닌 아버지 안드레아가 ‘추상적’ ‘예술적’으로 와인을 빚었다면, 벤자민은 공대 출신답게 철두철미한 ‘최적화’ ‘체계적’ 분석을 통해 와인을 만듭니다.

페놀릭 라입니스(Phenolic Ripeness)와 슈가 라입니스(Sugar Ripeness)가 딱 맞아 떨어지는 시기에 수확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벤자민은 이를 ‘블루’라고 부릅니다. 포도는 페놀의 익은 상태가 매우 중요합니다. 껍질, 씨앗, 줄기에는 탄닌, 안토시아닌, 색소 등 페놀 화합물(compounds)이 포함돼 있습니다. 탄닌이 너무 덜 익으면 와인은 거칠고 떫고 쓴맛이 강해집니다. 탄닌이 잘 익으면 부드럽고 매끄러운 질감이 얻어집니다. 또 페놀 화합물이 잘 익으면 와인에 구조감과 복합미를 더합니다. 안토시아닌이 잘 익으면 포도에서 풍부한 색이 나옵니다. 슈가 라입니스는 포도 과육에서 당분 함량이 충분히 높아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과일향이 더 풍성하게 얻어지고 알코올도수와 풍미에도 영향을 줍니다.


◆카베르네 프랑의 장인되다
안드레아는 1992년 포도밭을 일굴 때 수퍼투스칸 와인을 만들 대표 품종으로 카베르네 프랑을 선택합니다. 다른 슈퍼투스칸 생산자들은 카베르네 소비뇽에 집중하던 시절이었지만 안드레아는 카베르네 프랑이 떼루아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선구안은 카베르네 프랑 100%로 빚는 3개의 싱글빈야드 와인, 이 깜피(I Campi)를 탄생시킵니다.
캄포 디 마그나코스타(Campo di Magnacosta)는 2011년 가장 처음 선보인 싱글빈야드 카베르네 프랑입니다. 마그나코스타는 해발고도 400m 계곡 아래에 강의 자갈과 실트(미사토)로 이뤄진 1.5ha 규모 포도밭입니다. 이곳은 과거 개울이 언덕을 파고들며 형성된 지형이라 ‘Magna(먹다)’와 ‘Costa(언덕)’가 합쳐진 마그나코스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밭에는 300년 넘게 카베르네 프랑을 재배한 보르도 우안 포므롤(Pomerol)의 포도밭에서 가져온 카베르네 프랑을 심었습니다. 3개 포도밭중 해발고도가 가장 낮고 계곡 바닥의 따뜻한 포도밭이라 가장 파워풀합니다. 2021은 알코올 도수가 무려 16%에 달하지만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밸런스가 뛰어나고 우아합니다. 달콤한 체리로 시작해 블랙체리, 블랙커런트, 바이올렛향, 붓꽃, 코코아, 멘톨, 구운 밤 껍질, 흙내음, 발사믹 노트, 미네랄이 잘 어우러집니다. 2021은 2700병 생산됐습니다.


나머지 두 곳은 2016년부터 싱글빈야드 와인으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캄포 디 테날리아(Campo di Tenaglia)는 부서진 석회암과 점토가 약 2.5m 두께로 덮인 해발고도 500m 포도밭으로 0.8ha 규모입니다.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는 포도밭이라 오후의 햇살을 더 많이 받습니다. 달콤하고 농밀한 레드체리, 블랙베리, 블랙체리로 시작해 온도가 오르면서 기분 좋은 초콜릿향이 올라옵니다. 피니시에서 생기 넘치는 민트향이 느껴집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세련되고 정제된 느낌을 함께 지녔습니다. 마그나코스타보다는 밸런스가 더 좋고 폭발력은 다소 적어 얌전하게 느껴집니다. 2021은 1500병 생산됐습니다.

캄포 디 카마지(Campo di Camagi)는 해발고도 550m 1.5ha 포도밭으로 석영과 석회암이 부서진 토양입니다. 매우 얇은 토양층에 촘촘하게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높은 고도 덕분에 2021년은 덥고 건조했지만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이 탄생했습니다. 농익은 블루베리, 블랙베리로 시작해 민트의 허브향이 이어지고 비 내린 뒤 흙냄새, 숲속 이끼향, 발사믹 노트 등 숙성향이 풍성하게 더해집니다. 중간 팔렛에서 철분의 미네랄과 강한 감칠맛이 느껴집니다. 산도, 허브 발사믹노트가 조화를 이루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완성도와 균형감이 모두 뛰어난 카베르네 프랑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2021은 2000병 생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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