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의 고희진 감독은 2024~2025시즌을 앞둔 지난해 5월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현장에서 배구계의 의구심을 자아내는 선택을 했다. 2023~2024시즌 도로공사에서 아포짓 스파이커로 뛰었던 반야 부키리치(세르비아)를 2순위로 지명한 것. 이미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인 메가(인도네시아)라는 걸출한 아포짓 스파이커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둘을 과연 코트 위에 공존시킬 수 있겠냐는 시선이 많았다.

고민 끝에 고 감독은 부키리치를 아웃사이드 히터로 전향시켰다. 둘 중 누가 더 리시브가 더 괜찮은지가 아닌 누가 더 아웃사이드 히터 자리에서 공격을 편하게 생각하느냐를 보고 판단한 결과였다. 청소년 시절 이후 리시브를 거의 받지 않았던 부키리치지만, 고 감독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맹훈련을 거듭했다. 리시브 효율 10위(34.38%)에 오르는 등 쏠쏠한 리시브 능력을 보이며 ‘세르비아 배구천재’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기에 1m98의 큰 키에서 나오는 고공강타는 여전했다. 부키리치의 희생 속에 정관장에서 2년차 시즌을 보내는 메가는 득점 3위(802점), 공격종합 1위(48.06%) 등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를 통틀어 최강의 외인으로 군림하며 정관장의 공격을 우직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고 감독의 선택은 11개월이 흐른 현재 ‘신의 한수’로 판명났다. 여자부 ‘최강 쌍포’의 활약을 앞세워 정관장은 정규리그를 3위로 마친 뒤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랐다. 2011~2012시즌 이후 13시즌만의 쾌거였다.
세터 염혜선의 노련한 경기운영 아래 메가와 부키리치의 화력은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변함없이 터졌고, 우승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마지막 한 끗, 딱 한 끗이 모자랐다.

정관장은 8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결정 5차전 방문 경기에서 흥국생명에 세트 스코어 2-3(24-26 24-26 26-24 25-23 13-15)으로 패했다.
경기 초반만 해도 정관장은 패색이 짙었다. 이날 경기를 끝으로 코트를 영원히 떠나는 흥국생명의 ‘배구여제’ 김연경이 1,2세트에만 각각 10점씩을 폭발시키며 듀스 승부를 모두 잡아내면서 정관장은 세트 스코어 0-2로 몰렸다.


그러나 정관장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인천 원정에서 1,2차전을 모두 패하고, 대전 홈에서 치른 3차전 1,2세트를 내주며 챔피언결정전 패배에 딱 한 세트를 남겨놓은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팀이 정관장이었다. 심지어 주전 중 몸이 성한 선수보다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 더 많았음에도 정관장은 투혼으로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지까지 올랐다. 3차전 3세트부터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며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온 정관장은 3,4세트를 잡아내며 기어코 5차전 승부도 5세트로 끌고갔다. 그러나 5세트 막판에 딱 한 방이 부족했다. 12-14에서 김연경의 백어택을 블로킹해내며 13-14까지 끌고갔지만, 투트쿠에게 일격을 얻어맞으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바람에 이번 챔프전에서 정관장은 ‘악역’에 가까운 대접을 받아야 했다. 이를 잘 알던 주장 염혜선은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악역을 자처했다. 1,2차전 패배 후 3,4차전을 승리한 뒤에는 “어쩌면 우리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악역이 악역으로 끝나지 않고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며 배구 팬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수 있는 ‘패자’로 남았다.


‘패장’으로 올 시즌 마지막 인터뷰에 임한 고 감독도 ‘패장의 품격’이 넘치는 깔끔한 인터뷰를 남겼다. 그는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라온 것도 대단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명승부를 펼친 건 더 대단하다”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흥국생명과 김연경에 대한 예우도 잊지 않았다. 고희진 감독은 “흥국생명의 우승을 축하한다. 한국에 돌아온 뒤 우승을 열망했던 김연경도 화려하게 시즌을 마무리한 것을 축하한다”고 인사했다. 이어 “5세트 막판(13-11, 14-13)에서 김연경이 몸을 던지는 수비를 했다. 그 수비가 흥국생명의 우승을 만들었다”면서 코트를 떠나는 배구여제를 치하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