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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고향 거리를 걷는다. 고향에서 산 것보다 고향을 떠나 산 지가 더 오래라 은밀히 말하면 오늘 내가 걷는 거리는 예전에 내가 아는 고향 거리는 아니다. 변해도 정말 많이 변하여 약간이라도 옛 정취를 되살려 주는 건 동네 이름이 주는 향수뿐이다.

그래도 길을 걷다 보면 어느 후미진 골목과 골목 사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곳이 한두 군데 눈에 띈다. 개발의 힘이 피해 간 곳. 인공의 미가 자연의 우호적인 무관심에 고개 숙인 곳. 그런 곳을 만날 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루두루 돌아본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스며든 세월의 더께를 알아보고 발견해 내듯이. 그러나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되돌아오는 것도 없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변하면 끝이다. 남는 것도 없고 남겨놓을 것도 없이 모든 게 황무지, 무(無)가 되어버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든 만남과 이별이 시야를 벗어나면 다시 돌아올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그래도 해변을 걷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바다 냄새 때문이다. 그 냄새는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냄새처럼 수평선 위로 그리움이란 무지개를 사방으로 퍼뜨린다. 엄마 손을 잡고 맨발로 해운대 해변을 걷고 광안리 해변을 걷고 태종대 몽돌해변으로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던 나날들이 내게도 있었다는 것. 그 따뜻한 추억의 한 조각이 고향 바다를 걷는 나를 마냥 천진무구한 아이로, 아직도 사람을 믿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을 바꿀 힘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 찾으려 희망하고 기대하는 사람으로 늙어가게 만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살짝 흐리긴 해도 크고 작은 구름들이 서로 다른 욕망을 품고 방금 고향에 도착한 사람들 머리 위로 천천히 흘러 다니며 웃고 있다. 저 웃음들이 거리가 주는 생동감과 익명성이 되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소란스럽고 분주하고 활기차게 만든다.

나는 그 어디쯤 앉아 내 기억의 호주머니 속으로 고향의 길들을 마구 집어넣는다. 어떤 길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린 듯하고, 어떤 길은 외국어처럼 가도 가도 낯설고, 어떤 길은 금방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밝고 화사하고, 어떤 길은 다시는 오지 말라는 듯 마음에 숭숭 구멍을 내고, 어떤 길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알 수 없는 큰 사랑으로 파란 기지개를 켜고, 어떤 길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언제나 나를 반기고 안아준다. 그러다 만난 녹슬고 버려진 철길. 그 오래되고 낡은 철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린 노인처럼 나를 붙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시로 옮긴다. 그게 내 고향이 내게 준 선물. 오직 살아 있는 이만이 즐길 수 있는, 시로 숨 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크나큰 기억의 선물!

김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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