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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의전쟁이야기] 호국보훈의 달과 육사생도 참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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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23 22:58:50 수정 : 2024-06-23 22: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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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대규모 남침을 감행했다. 이에 국군은 정치적,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수도 서울을 지키려 했으나, 특히 서울로 가는 최단 거리인 동두천-의정부와 포천-의정부 축선에 전차를 앞세우며 전력을 집중한 북한군의 공격에 오전 11시 무렵 포천이 함락되면서 서울을 향해 동쪽으로 우회해서 진입할 수 있는 오늘날의 47번 도로 축선이 열리고 말았다. 후방의 부대들이 서울 방어와 38선 회복을 위해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당장 여기를 막을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육군본부는 육사 생도와 경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생도의 전선 투입은 논란이 있는 결정이다. 당시 육사에는 졸업을 20일 앞둔 생도 1기와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생도 2기가 있었다. 군은 우수한 인재인 생도들을 나중에 임관시켜 장교로 활용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 사수가 시급한 과제였던 군 수뇌부는 생도들을 소총수로 투입하는 결정을 했다. 26일 생도들은 포천군 내촌면 팔야리 일대의 372고지에서 북한군 3사단 9연대 병력과 처절한 전투를 전개했다. 특히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있던 330고지에 위치했던 경찰대대가 북한군의 공격에 곧바로 퇴각하는 바람에 고립된 상태에서 무려 3시간을 버텨냈다. 전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오로지 육사 생도라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높은 전투의지와 부대의 응집력을 발휘했던 결과였다.

육사생도 6·25 참전 기념비(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우금리 소재)

포천에서 육사로 철수한 생도들은 27일 태릉 일대에서 학교 내부의 92고지에서 태릉골프장, 불암산을 잇는 방어선을 편성했다. 하지만 28일 새벽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한강 이남으로 삼삼오오 철수한 이들은 한강 방어선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고, 이 과정 중에 또다시 수많은 희생을 냈다. 서울 사수라는 최초 목표가 이미 실패했음에도 생도들을 장교로 임관시켜 지휘자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하지 않고 계속 소총수로 운용한 부분은 분명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한편, 미처 철수하지 못한 생도들은 학교 근처의 불암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조직했다. 생도 13명과 7사단 병사 7명으로 구성된 일명 ‘불암산 호랑이’는 적지에서 유격대 활동을 실시했고,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곧 서울이 수복된다는 소식을 알았음에도 9월21일 납북된 주민을 구출하고자 거의 맨몸으로 전투에 뛰어들어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6·25전쟁 기간 동안, 생도 1, 2기 539명 중 절반에 가까운 245명이 전사했고, 이 중 150명은 생도 신분이었다. 이러한 사관생도들의 전투 참여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청운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목숨을 바친 어린 생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한번씩 기억해보면 어떨까?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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