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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0일 5공 전두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독재 타도’와 ‘호헌(護憲) 철폐’를 외치며 서울 명동성당을 점거했다. 이른바 ‘6월항쟁’이다. 안기부장(현 국가정보원장) 주재로 공안장관 회의가 열렸다. “명동성당에 전경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제기됐다. 당시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고건은 반대했다. 그는 “성당에 전경이 강제 진입하면 바티칸(교황청)에서 가만 있겠느냐”며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가톨릭에서 불매운동 한마디라도 하면 한국 경제는 망한다”고 했다. 결국 고건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정부는 시위대의 자율적 해산을 기다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년 재위).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때 교황은 폴란드 국적의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였다.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 성직자들이 교황을 독식하던 전례를 깨고 1978년 동유럽 출신으로 처음 교황에 올랐다.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교황이 배출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는 동서 냉전이 극에 달한 동시에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내부 모순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던 시기였다. 투철한 반공주의자였던 요한 바오로 2세의 탄생은 사회주의 붕괴와 냉전 종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오늘날 요한 바오로 2세를 두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소개한 고건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며 야당 정치인 김대중(DJ)은 내란 음모 혐의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때 요한 바오로 2세는 직접 서한까지 써서 보내며 DJ 구명에 앞장섰다. 결국 DJ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에는 감옥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훗날 DJ가 대통령이 되고 평양에 가서 북한 지도자 김정일과 만난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고 대한민국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머무르길 바란다’는 내용의 기념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1984년 5월3일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착륙한 특별기에서 내리자마자 한국 땅에 입맞춤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3일은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한지 꼭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교황의 방한은 그때가 사상 처음이었다. 1984년 5월3일 김포공항에 착륙한 특별기에서 내린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릎을 꿇고 한국 땅에 입을 맞추는 모습은 지금도 국민들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그는 도착 성명에서 한국인들을 향해 “여러분의 조국이 대결과 전쟁이 아니고 대화와 상호 신뢰, 형제애로 다시 화목한 한가족이 되어 불신과 증오, 무력 같은 이 세상의 거짓됨을 폭로해주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언론들은 ‘역사적 방한’, ‘분단의 땅에 입맞추다’ 등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교황을 반겼다. 지금 돌이켜 봐도 한반도에 강림한 ‘5월의 크리스마스’였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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