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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기틀 세운 韓 경제 설계자들

입력 : 2024-04-19 20:15:39 수정 : 2024-04-19 20: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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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1938년생 13人의 관료들 조명
송인상, 경제개발 3개년계획 수립 추진
남덕우, 긴축통화 정책·기업 사채 동결
미숙했던 韓 경제 시스템서 ‘고군분투’

경제 관료의 시대/홍제환/너머북스/2만6500원

 

“자원이 없는 한국이 살길은,” 한국은행 부총재 당시 열정적인 외교 활동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인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가입을 이뤄낸 송인상 부흥부 장관은 유엔이 제시한 한국의 경제 성장 전략에 반대했다. “공업화로 수출 강국이 되는 것입니다.”

유엔은 한국에 장기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면서 전후 부흥을 위한 5개년계획으로 만든 ‘네이산리포트’를 통해 다른 아시아 독립국처럼 농업 기술을 발전시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송인상은 한국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라며 수출 지향의 경제를 통해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맞섰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 성장기를 주도한 경제 관료 13명을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왼쪽 사진부터 백두진, 송인상, 장기영, 김학렬. 너머북스 제공

1957년 이승만정부의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된 송인상은 한 발 나아가 국가의 장기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시도했다. 이즈음, 미국은 자국의 경제 사정에 따라서 직접 원조를 줄이고 차관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 중이었다. 무상 원조가 아닌 차관으로 돈을 빌리는 것이니 나중에 갚아야 했기 때문에 명확한 계획이 있어야 했다.

각국의 경제개발 계획을 공부했던 그는 통상적인 조직으론 체계적 장기 개발계획을 수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별도의 기획기구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했다. 아울러 계획 입안을 지원할 해외 대학도 물색에 나서, 미국 오리건대와 계약을 맺고 다섯 명의 교수를 초청하기도 했다.

처음 7개년계획을 생각했지만, 우선 1단계로 3개년계획을 수립했다. 비록 3개년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채 1959년 재무부 장관으로 옮기게 됐지만, 얼마 뒤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최종적으로 마련될 수 있었다. 산업연관분석표를 만들고 투자 대비 성과를 예측해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송인상 주도로 마련된 첫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4·19혁명이 발발하면서 실제로 집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획 입안 과정에서 한국 경제의 현황과 실정, 발전 방향과 전략, 구체적인 방법과 사업 계획 등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와 검토가 이뤄졌다. 아울러 입안 과정에 참여한 많은 관료는 다음 민주당 정권이나 나중에 박정희정부에서 개발계획 입안에 다시 참여해 한국 경제 성장의 밑그림을 마련하는 데 앞장설 수 있었다.

오원철(왼쪽부터), 남덕우, 신현확, 김재익. 너머북스 제공

“최초로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경제 실태와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개발 전략을 마련하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 송인상이 주도하여 마련됐던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경제사적으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송인상은 장기 경제개발계획 입안 이외에도 환율 사수를 위해 분투했고, 공무원 공채시험을 도입하면서 특채 제도도 병행해 인재 발굴과 양성에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강학파 태두’로 불린 남덕우는 1969년 재무부 장관에 임명돼 긴축통화 정책을 실시했고 나중에 도입되는 부가가치세 도입 논의를 시작했다. 1972년 기업의 사채를 동결해 기업 금융환경을 개선한 8·3조치를 단행했고, 이듬해부터 중화학공업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투자기금을 고안하기도 했다. 197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된 그는 고물가와 저성장, 국제수지 악화의 3중고를 극복하기 위해서 환율 인상을 골자로 한 12·7조치를 발표했다. 중동 진출을 위한 경제외교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홍제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신간 ‘경제 관료의 시대’에서 송인상과 남덕우를 비롯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 경제 성장을 정책으로 입안하고 주도한 경제 관료 13명을 조명했다.

이들 분석 대상에는 송인상, 남덕우 외에도 1950년대 한국 경제의 재건과 부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한 백두진, 1960년대 외자를 도입해 수출주도형 경제 성장을 실현해 가던 과정에서 활약한 ‘불도저’ 장기영과 ‘쓰루’ 김학렬, 경제외교 현장을 누빈 양윤세과 황병태,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주도한 최형섭과 김재관, ‘박정희의 경제 총참모장’ 김정렴,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 오원철, 1980년대 성장 중심 정책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역할한 신현확과 김재익 등이 포함돼 있다.

홍제환/너머북스/2만6500원

이들 13명의 경제 관료는 1908년생(백두진)부터 1938년생(김재익)까지 대략 한 세대에 걸쳐 분포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은행(한국은행) 출신이었다. 13명 중 9명이 장관을 역임했는데, 평균 연령이 44.7세에 불과했다. 최연소는 신현확(39세)이었으며 백두진, 송인상, 김학렬, 김정렴은 42∼43세에 장관이 되었다.

저자는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땀과 눈물을 쏟은 국민과 기업은 물론 정부, 특히 경제 관료들의 노력도 있었기에 한강의 기적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한국 경제가 거듭 찾아온 난관을 잘 극복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유능한 경제 관료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당시에는 장기영, 김학렬, 오원철, 김정렴, 남덕우, 신현확 등 오늘날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 관료로 회자되는 이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이 시기를 ‘경제 관료의 시대’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저자는 다만 현대는 과거와 경제 구조가 완전히 다르고, 법과 제도가 촘촘하게 완비돼 관료들의 운신 폭이 확 줄었으며, 한국 경제의 틀도 거의 완성돼 개인 성과가 부각되기 어려워 스타 경제 관료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결국 개개인 역량보다는 경제 환경의 변화라는 구조적 요인이 스타 경제 관료의 출현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분석했다.

“요컨대, 스타 경제 관료들이 출현하는 ‘경제 관료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 경제가 그만큼 미숙하고 취약해 개인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오늘날 두각을 나타내는 경제 관료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만큼 한국 경제가 성숙하여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개인이 부각되거나 개인 역량에 좌우될 여지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관료 개개인의 역량이라는 요인보다는 경제 환경의 변화라는 구조적 요인이 ‘스타’ 경제 관료의 출현 여부를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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