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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가장 인상적인 장편 데뷔작으로 기대되는 영화가 개봉했다. 정지혜 감독의 ‘정순’이다. 한국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전 세계 19개 영화제를 순회하면서 각종 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디지털 성범죄, 정확히는 ‘사적 영상 비동의 유포’라는 이슈를 다룬 영화이다. N번방, 박사방 사건 등을 겪으면서 각종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인 사회 현상을 반영하듯이, ‘성덕’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발레리나’ ‘걸캅스’ ‘경아의 딸’ 등 이 이슈를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극영화도 상당수 만들어졌다.

영화 ‘정순’은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정순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집에서는 엄마로, 직장에서는 이모로 불리는 정순은 공장에서 만난 영수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와의 사적인 시간을 동영상으로 남긴다. 그러나 어느 날 동영상이 온라인에 유포되면서 그녀의 행복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돌변한다. 수치심에 사로잡혀 칩거하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수인과도 같은 전형적인 피해자의 이미지이다. 이렇듯 속절없이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상황에 발가벗겨진 피해자 정순의 모습을 보여 주던 카메라는 머지않아 이번에는 ‘피해자다움’이라는 전형성에서 단호하게 빠져나오는 정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변화는 조금은 단절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정순에게 일어난 극적인 변화의 계기를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관객은 가해자를 용서하려는 엄마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만큼이나 엄마의 정반대의 변화도 낯설었을 딸 유진의 위치를 공유하는지도 모르겠다.

변화의 이유가 무엇이든 칩거하던 그녀가 갑자기 집안 커튼을 열고 빨래를 하고 공장에 나와 그녀에게 지옥행 티켓을 끊어 주었던 동영상 속의 퍼포먼스를 재연할 때 우리는 삶을 향한 그녀의 의지가 강렬하게 재점화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적당한 거리에서 정순을 관조하던 카메라는 그녀에게 지진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난 순간부터 그녀와 밀착하여 호흡하기 시작한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정순의 몸을 ‘비체(abject)’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 영화의 오프닝에서 운전석 조수석에 수동적으로 앉아 있던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운전석으로 옮겨 앉는 장면은 그녀의 변화를 가장 극으로 보여 주는 장면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정순을 응원한다.


맹수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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