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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호카곶에서 만난 ‘인생 노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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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7 03:00:00 수정 : 2024-03-27 01: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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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최서단 호카곳/국민시인 카몽이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노래/섬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 펼쳐지는 붉은 노을 감동의 대서사시

 

호카곶 저녁노을.

아무리 둘러봐도 섬 하나 없는 그야말로 망망대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수평선과 한가로이 노니는 갈매기, 그리고 가파른 절벽을 때리는 파도의 하얀 포말뿐. 과연 더 이상 갈 곳 없는 세상의 마지막이라 여길 만하다.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호카곶(cabo da roca)에 섰다.

 

여행면.
타초 레알.

◆신트라에서 즐기는 노포의 맛과 타일 공예

 

포르투갈 리스본 외곽 당일치기 여행지 신트라 문화경관지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인기가 매우 높은 곳이다. 알록달록한 동화 속 나라 페나 궁전성, 이슬람 세력이 세운 역사의 현장 무어인의 성, 신비한 9층 지하탑을 만나는 헤갈레이라 별장, 왕가의 화려한 사생활이 담긴 신트라 궁전 등 많은 여행지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곳에는 차로 30분거리에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 호카곶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럽 사람들이 더 이상 땅이 없다고 여긴 특별한 곳이다.

 

타초 레알 역사.
타초 레알.

신트라 문화경관지구 오픈 시간부터 투어를 시작해도 성과 궁전 6곳을 모두 방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룻밤 묶으면 좋겠지만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라면 ‘신트라 3곳+호카곶’으로 일정을 짜면 아쉽지만 후회 없는 알찬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호카곶은 저녁노을이 장관이라 맨 나중 방문지로 배치하면 된다.

 

허브를 얹은 쌀밥.

금강산도 식후경. 아무리 빠듯해도 신트라 시내에서 맛있는 포르투갈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때론 여행은 맛으로 기억되니까. 신트라 궁전 인근 시내에는 많은 음식점이 있어 입맛대로 골라서 가면 된다. 일부러 맛집 검색을 하지 않고 무작정 걷는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 끝자락 즘에 오랜 손맛이 숨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크기에. 아니나 다를까. 10여분 골목을 오르자 한눈에도 작지만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19세기에 비터(Vitor) 호텔로 문을 연 레스토랑 타초 레알(Tacho Real)로 들어서자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녹색 타일 장식으로 꾸민 실내가 아늑하다. 세월이 묻어나는 테이블, 탁자, 소파는 레스토랑 지나온 시간과 많은 손님의 사연을 가득 품고 있다.

 

농어구이.
새우·연어필릿.

직원이 추천하는 농어구이와 새우·연어필릿 요리를 주문한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밥이 먼저 나오는 걸 보니 한국의 정서와 많이 닮았다. 그래 한국인은 ‘밥심’이지. 은근하게 졸인 로제 소스를 듬뿍 뿌린 따뜻하고 부드러운 새우 한 마리 허겁지겁 밀어넣으니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여행의 피로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소스가 자극적이지 않아 새우의 맛을 잘 살렸다. 레스토랑을 제대로 골랐다. 요즘말로 ‘찐’이다. 브로컬리와 찐 감자를 곁들인 농어구이는 ‘겉바속촉’이다. 노릇노릇 익은 생선살 한 점 떼어내 밥 위에 얹어 먹으니 어린시절 어머니가 늘 밥상에 내던 생선구이의 추억으로 잡아 이끈다. 비린내 등 잡내를 완벽하게 잡아낸 농어구이 요리 덕분에 밥 한 공기는 순식간에 바닥을 보인다.

세라믹 타일 그림 전문점.
세라믹 타일 작품.
작가의 작업실.
리스본 명물 28번 트램을 담은 작품.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골목여행에 나선다. 레스토랑 문을 나서자마자 타일아트 공예품점 세라미카 드 신트라의 주인장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담벼락에 걸린 작품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주인장은 인근에 아틀리에 ‘카사 뮤제우’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는 알메이다 코발 교수와 제자들의 작품을 주로 판매한다고 귀띔한다. 모두 손으로 직접 그린 작품들로 리스본 시내 기념품점에서 파는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타일 작품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쪽에 마련된 작업실에 놓인 다양한 물감들 사이로 예술의 향기를 머금은 노작가의 체취가 묻어난다. 여러 작품 중 마음에 쏙 드는 리스본 명물 28번 트램을 담은 작품을 골랐다. 가격이 꽤 높지만 만족도는 그보다 더 크니 신트라를 여행한다면 타일 작품 구입을 적극 추천한다.

 

호카곶.
호카곶.

◆세상의 끝 호카곶에서 만난 인생 노을

 

신트라역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볼트 택시를 추천한다. 휴대전화 앱으로 부르면 5분 만에 바로 달려오고 요금도 편도 12유로 안팎으로 매우 착하다. 편하게 택시를 타고 30분가량 달려 마지막 산등성이를 넘자 발아래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해가 지려면 아직 두 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포르투갈 여행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몰려 인파로 넘친다.

 

호카곶 십자가 돌탑.

더 이상 갈 곳 없는 땅의 끝자락이기 때문일까. 흔한 바다이지만 호카곶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섬 하나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망망대해. TV로 따지면 거실 벽을 모두 채운 대화면을 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다. 강대국들에 막혀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던 포르투갈 사람들은 호카곶을 끝이라는 절망보다 시작이라는 희망으로 여겼다. 저 바다 너머에 자신들을 기다리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부푼 꿈을 품고 끊임없이 바다로 나아갔다.

 

시인 카몽이스의 글과 경도·위도 표시.

호카곶 허허벌판 십자가 돌탑이 이를 말한다.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AQUI...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바로 돌탑에 새겨져 있다. 인증샷을 찍으려는 줄이 아주 길어 제대로 사진을 건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호카곶 등대.
호카곶 등대.
호카곶 등대 절벽.

북쪽 언덕 위 빨간 탑은 호카곶 등대. 높이 144m의 화강암 절벽에 선 아름다운 등대는 1772년부터 밤마다 불을 밝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은 배들을 이끌었다. 호카곶 등대 포토존에 서니 발아래 깎아지른 절벽이 펼쳐져 간담이 서늘하다. 17세기 호카곶은 리스본 항구 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요새가 있었고 스페인 점령시절 독립 전쟁을 펼칠 때 해안가 방어선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카곶 저녁 노을.

해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자 호카곶 끝자락으로 여행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섬 하나 없는 바다에 오로지 붉은 태양만 살포시 내려앉는 낭만적인 풍경이라니.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직전 완벽하게 동그란 빨간 점 하나 폭발하듯 반짝이더니 이내 수평선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만다. 평생 잊지 못할 장엄한 아름다움에 그만 나도 몰래 눈물을 한 방울 툭 떨어뜨렸다. 


신트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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