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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감·젠더 폭력… ‘여성 광부’로 보낸 2년

입력 : 2024-03-23 06:00:00 수정 : 2024-03-23 01: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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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금 상환 위해 加 앨버타行
오일샌드 채굴업체 근무 경험
파티서 두 번이나 성폭력 피해
주야간 교대 근무 등 환경 열악
남녀 대립 아닌 입체 묘사 눈길

오리들/케이트 비턴/김희진 옮김/김영사/2만9800원

 

“밤에 여기 있을 때 누구랑 슬며시 저 뒤에 숨은 적 있어? 잠깐 즐기려고.”

“어떤 남자가 걔한테 그런 거야. ‘너랑 저 넝마 더미 위에서 한판 뜨고 싶다.’ 걘 바로 그 남잘 잘리게 했단 거 아니겠어.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야지, 미치광이 계집애 같으니.”

‘오리들’은 캐나다 동부에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서부의 오일샌드 채굴지에서 2년간 일하면서 고립감, 젠더 폭력, 인간 소외 등을 경험한 내용을 담은 회고록이다. 김영사 제공

스물두 살의 캐나다 여성 케이트 비턴이 일터에서 수시로 들은 말들이다. 2005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캐나다 서부 앨버타로 간다. 고향인 동부에는 일자리가 없었지만 서부 오일샌드 채굴지는 대호황이었다. 그는 거대 기업의 오일샌드 광산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시급은 높았지만 일터에서는 성희롱, 인간 소외, 고립감, 환경 파괴가 횡행했다.

그래픽 노블 ‘오리들: 돈과 기름의 땅, 오일샌드에서 보낸 2년’은 캐나다 유명 만화가인 비턴이 과거 오일샌드에서 일한 경험을 담은 회고록이다. 오일샌드 채굴지는 남성 50명 대 여성 1명 비율로 성별 쏠림이 극심하다. 외부 세계와 동떨어져 삭막하고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고립감과 지루함, 인간성 상실, 젠더 폭력을 겪는 일이 다반사다. 비턴은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 아들인 현장직 남성들이 열악한 일터에서 일탈하는 모습, 여성이 겪는 폭력적 문화를 입체적으로 그린다.

 

저자가 생소한 오일샌드 채굴지에 취업한 건 ‘목줄을 밟고 있는 학자금 대출’ 때문이다. 문학사 학위로는 대출을 갚을 만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케이트 비턴/김희진 옮김/김영사/2만9800원

그의 첫 직장은 세계적 오일샌드 업체의 광산 공구실. 현장 노동자들에게 공구를 내주고 관리하면서 그는 늘 ‘귀염둥이’ ‘예쁜이’ ‘계집×’ 같은 호칭을 들었다. 다른 여성들도 ‘팔팔한 아가씨’ ‘꽃뱀 아줌마’ ‘밝히는 아줌마’로 불렸다. 여성들의 사생활은 험담 거리였다. 12시간 주야간 교대근무로 몸은 녹초가 됐고, 오염된 공기로 일이 끝나면 먼지덩이를 내뱉었다.

시급이 더 많지만 개발 초기라 환경이 열악한 롱 레이크로 가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저자는 집세가 없는 광산 내 ‘캠프’에서 살았다. 정규직이 아니기에 여성 전용이 아닌 남녀 혼용 숙소에서 지내야 했다. 잠긴 문 손잡이가 달그락거리거나 흑심을 품은 남성이 실수인 척 방문을 열곤 했다. 옷장에서 숨은 남성이 튀어나오거나, 청소하러 들어가니 남성이 벌거벗고 기다리는 일을 겪은 여성들도 있었다.

저자가 새 공구실에 배치되자 ‘새로 온 여자’를 보려고 남성 노동자들이 건물을 빙 돌아 긴 줄을 섰다. ‘엉덩이가 탱탱하네’ ‘캠프 기준 7점’ 식의 성희롱 발언이 들려왔다. 관리자에게 사정을 말했지만 돌아온 말은 “여기선 팀으로 일하는 거야, 발 들였을 때부터 이곳이 남자들 세상이란 걸 알고 있었잖아, 좀 태연하게 구는 법을 익혀야지, 내가 누구를 특별 대우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였다.

이런 환경을 체감한 저자는 이후 파티에서 두 번이나 성폭력을 당하지만 고발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괴로운데”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남성들이 무슨 말을 할지 무서워서였다.

김영사 제공

이 책의 미덕은 오일샌드를 단순히 남녀·선악의 대립 구도로 그리지 않는 점에 있다. 오일샌드 광산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들의 원인, 모든 사람이 나쁜 건 아니며 인간미가 있는 소소한 일상도 있음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낸다.

과한 남성성과 폐쇄성이 특징인 이곳은 남성에게도 가혹한 일터였다. 마약에 빠지거나 아내와 아이 넷을 두고도 바람을 피우려는 이들이 생겨났다.

신문사 기자가 취재차 전화했을 때 저자가 한 고민은 복잡한 현실을 잘 보여 준다. 그는 동료에게 “온갖 성희롱이며, 그게 얼마나 기분 더러우며 남자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런 얘길 듣고 싶어 하더라. 선정적인 싸구려 기삿거리 같았다”고 말한다. 실제 현실이 그랬지만 기자가 원하는 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그 기자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남자들도 별다를 바 없으리라는 걸 믿지 못할 거야. 외로움과 향수병과 지루함과 여자가 드물다는 점이 자기 형제나 아버지나 남편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지. 그러니까 쉽게도 여길 대충 훑어보고 모든 게 더럽고 추하다고 결론짓지. 본인은 토론토의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여기서 성희롱을 겪는 동안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이 불쾌한 말을 한다는 게 아냐. 그런 말을 할 때 그들의 말투가 나와 똑같고, 내가 대학에 가면서 버린 그 억양을 쓴다는 거야.”

책은 젠더 폭력 외에도 오일샌드 광산의 환경 파괴와 원주민 생존권 위협, 환경단체 시위에 어처구니없는 대책을 내놓는 회사, 현장 직원에게 싸구려 안전조끼를 주고 몇 초 둘러보는 ‘높으신 분들’에게 수백달러짜리 안전조끼를 입히는 현실을 고발한다.

이 책은 2022년 출간돼 뉴욕타임스 등이 선정한 올해의 책에 포함됐다. 미국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인 아이스너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래픽 회고록과 작가상을 수상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꼽은 올해의 책 리스트에 그래픽 노블로는 처음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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