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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 앞에 늘어선 카페들 사이에서 나는 그날의 목적을 더듬어보곤 했다. 급히 원고를 써야 한다거나 업무 때문에 노트북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날엔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를 이용했다. 지인과 수다를 떨고 싶을 땐 커피향이 좋고 디저트류가 다양한 개인 카페를, 어딘가로 서둘러 이동하며 머리끝까지 카페인을 채워야 할 땐 저렴한 가격대의 테이크아웃 전문점을 이용했다. 그날은 작은 책을 여유롭게 읽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조명이 느슨하고 낮에 사람이 적은 카페를 골랐다.

나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책 속에서는 어느 일요일 아침, 먼 친척에게 맡겨지기 위해 집을 떠나는 소녀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여러 번 읽었고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또 한 번 읽으려던 참이었다.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작은 것들이 달각였다. 내 바로 뒤 테이블에 손님이 앉은 모양이었다. 얇은 비닐 구겨지는 소리가 잠시, 낮은 한숨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누군가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여러 번 울렸고 “근데 말이야” 하고 한 사람이 입을 뗐다. 나는 그런 식의 대화에 약했다. “근데 말이야” 하고 운을 떼는 사람은 틀림없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니까 말이다. 어떤 혼란이 저 테이블에 들이닥치게 될지 궁금해하며 나는 피낭시에를 덥석덥석 먹어치웠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잦은 한숨과 달리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십대 후반의 연인이 마주앉아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도 남성이었다. “그걸 왜 니가 걱정해?” 나쁜 자식.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뭔가 나쁜 말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몰고 누군가의 무책임한 행동을 장려하는 말이 따라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넌 그냥 아빠 될 결심만 하면 되는 거야. 네가 좋은 아빠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그 애가 판단할 테니까.” 긴장이 풀렸는지 가벼운 목소리들이 오고갔다. 뭐야, ‘헤어질 결심’이냐? 아빠 될 결심은 다큐다, 임마.

대학 졸업을 앞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내내 망설이고만 있었다.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할지 적당한 곳에 취직해 원만한 삶을 꾸려갈지 고민이었다. 작가 되기와 원만한 삶은 어떻게 해도 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작가가 되고 싶었고, 마냥 꿈을 좇기엔 가난이 두려웠다. 나는 앞으로 내가 상실하게 될 것들의 목록을 길게 작성했다. 주말이 있는 안정된 삶과 월급과 노후준비 같은 것들이 내가 제일 먼저 잃게 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라고 나는 썼다. 그럼에도, 가난한 잉여인간이 될지라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무모한 마음이 나를 지금에 이르게 했다.

그러고 보면 좋은 무엇, 훌륭한 무엇이 돼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망설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해내고자 애쓰는 마음이 오히려 아무것도 결심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도. 이리저리 결괏값을 재보며 지레 포기했던 일들이 떠올라 새삼 아쉬워졌다. 작가 되기를 결심했던 그날처럼 무엇이 될 결심, 그것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분명 존재했을 테니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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