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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인물·정확한 문장… 한국 단편소설의 정수를 만나다

입력 : 2024-02-06 22:00:00 수정 : 2024-02-06 21: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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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출간

근대문학 이끈 ‘조선의 모파상’
총 14권 분량 중 4권 먼저 펴내
1권에 ‘달밤’등 단편 55편 담겨

‘구인회’ 등서 20년 넘게 창작
1946년 월북 후 행방 묘연해져

철썩, 하고 앞집 판자 밑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난다. 노인은 다리 부러진 돋보기 너머로 마치 모이를 쪼려는 닭의 눈을 하고서 수챗구멍을 내다본다. 뿌연 뜨물에 여러 가지가 휩쓸려 나온다. 호박 꼭지, 계란 껍질, 녹두 껍질.

“녹두 빈자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성북동 자택 앞의 이태준. 열화당 제공

노인은 오륙 년째 말끝마다 ‘젠장…’이라거나 ‘흥!’하는 코웃음을 붙이고 있다. 수차례 사업에 실패하면서 몰락해 친구 복덕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안 초시다.

“추석이 벌써 낼모레지! 젠장….”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기름내가 코에 풍기는 듯 대뜸 입안에 침이 홍건해지고 아래윗니가 송곳 끝같이 날카로워짐을 느낀다. 그는 그 날카로워진 이를 빈 입인 채 빠드득 소리가 나게 한 번 물어보고 고개를 든다.

군색해 보이는 안 초시를 비롯해, 구한말 무관 출신의 복덕방 주인 서 참의,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를 빌미로 대서업을 하려는 박희완 영감. 세 노인이 복덕방에서 무료하게 소일한다.

어느 날, 일확천금을 통해서 재기를 꿈꾸는 안 초시는 박 영감으로부터 서해안에 항구가 생긴다는 부동산 투자 정보를 듣고서 유명 무용가인 딸 경화에게 투자를 권한다. 아버지에게 용돈도 잘 주지 않던 경화는 아버지를 배제하고 직접 부동산에 투자한다.

일 년이 지나도 개발 소식이 들려오지 않다가, 모든 일이 박 영감에게 부동산 정보를 전해 준 사람에 의한 사기극임이 밝혀진다. 안 초시는 투자 실패에 따른 좌절과 비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경화는 아버지의 극단적 죽음으로 명성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다가 서 참의의 말에 따라서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게 되는데.

“‘나 서 참윌세 알겠나? 흥… 자네 참 호살세 호사야…. 잘 죽었으니. 자네 살았으문 이만 호살 해 보겠나? 인전 안경다리 고칠 걱정두 없구… 아무튼지….’

하는데 박희완 영감이 들어서더니

‘이 사람 취했네그려.’

하며 서 참의를 밀어냈다. 박희완 영감도 가슴이 답답하였다. 분향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한마디 했으면 속이 후련히 트일 것 같아서 잠깐 멈칫하고 서 있어 보았으나

‘으흑윽….’

하고 울음이 먼저 터져 그만 나오고 말았다.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도 묘지까지 나갈 작정이었으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도로 술집으로 나려오고 말았다.”

‘조선의 모파상’ 또는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이태준 작가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상허 이태준 전집’(14권) 1차분 네 권이 최근 출판사 열화당에 의해 출간됐다. 이태준 작가 단편집 표지들. 열화당 제공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식민지 자본주의 변화 속에서 소외된 세 노인의 좌절과 비애를 그린 이태준의 단편소설 ‘복덕방’이다. 1937년 발표된 작품으로, 안 초시와 딸 경화, 서 참의, 박희완 영감 등 구체적이고 생생한 인물들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의 모파상’ 또는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으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의 전집 1차분(사진)이 최근 출판사 열화당에 의해 출간됐다. 모두 14권 분량의 전집 가운데 1차분은 대표작 ‘복덕방’을 비롯해 그의 단편소설을 모은 제1권 ‘달밤’, 중편소설·희곡·시·아동문학을 엮은 2권 ‘해방 전후’,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과 ‘화관’을 묶은 3권, 장편 ‘제이의 운명’을 수록한 4권 등 모두 네 권이다.

특히 제1권에는 1925년 시대일보에 발표한 그의 등단작 ‘오몽녀’를 비롯해 대표작인 ‘달밤’, ‘불우선생’, ‘까마귀’, ‘복덕방’, ’돌다리’, ‘밤길’ 등 그의 단편 55편이 담겼다. 한국 단편소설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 그의 단편이 수록된 제1권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933년 발표된 ‘달밤’은 성북동으로 이사 온 ‘나’가 신문을 배달하는 ‘황수건’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비록 못난이지만 순박한 수건은 아내와 함께 형님 집에 얹혀살면서 신문 배달 보조원 일을 한다. 그의 희망은 신문 배달원이 되는 것이지만, 보조원 자리마저 잃는다. 나는 학교 앞에서 참외 장사라도 해보라고 삼 원을 주지만, 수건은 참외 장사도 실패한다. 달포 만에 찾아온 수건은 포도를 대여섯 송이 사왔다며 건네지만, 곧 사람이 쫓아오면서 훔친 것이 들통나고, 나는 포도 값을 대신 물어준다. 그 후 어느 날 밤, 나는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수건을 보지만 무안해 할까 봐 나무에 몸을 숨긴다.

“어제다. 문안에 들어갔다 늦어서 나오는데 불빛 없는 성북동 길 위에는 밝은 달빛이 깁을 깐 듯하였다. 그런데 포도원께를 올라오노라니까 누가 맑지도 못한 목청으로

‘사…게…와 나…미다까 다메이…끼…까….’를 부르며 큰길이 좁다는 듯이 휘적거리며 내려왔다. 보니까 수건이 같았다…. 그는 길을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고, 노래는 그 이상도 외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다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 하였다.”

‘복덕방’ 6년 뒤에 발표된 ‘돌다리’는 땅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아들 간 갈등을 통해서 물질만 중시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경성에서 유명한 의사가 된 아들 창섭은 병원 확장에 모자라는 돈을 고향 땅을 팔아 채우고 부모를 서울에 모시리라 생각하며 내려온다. 근검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는 장마로 내려앉은 돌다리를 보수하고 있었다. 창섭은 자신의 계획을 말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제안을 거절한다.

소련과 북한에 경도되면서 문학성이 떨어진 후기작을 제외하면, 이태준은 빼어난 인물과 구성, 정확한 문장으로 한국 단편소설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스스로도 단편집 ‘가마귀’ 서문에서 “내 생활에 다소 가치가 있었다면 그 가치의 화폐가 곧 이 단편집이라 하여도 마땅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여섯 살 때 휘문고보에 입학한 뒤부터 이태준은 글쓰기 습작을 했고, 틈틈이 교지와 중학생 잡지 등에 수필과 산문을 발표했다. 부모가 이미 작고한 뒤라 책장사를 하는 등 고학으로 힘겹게 학교를 다녔다. 휘문고보 문예부장을 맡은 뒤 동맹휴업 주모자로 지목돼 퇴학당했고, 그해 가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하면서 와세다대 청강생으로 공부하기도 했고, 조치대에 입학하기도 했다. 이때 나도향, 김용준 등과 교유했고, 문학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소설가 이태준의 원점이었다.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1925년 일본에서 시골 여성의 무절제한 성생활을 그린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해 입선되면서 등단했다. 단편집 ‘달밤’, ‘가마귀’, ‘돌다리’ 등을,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 ‘제이의 운명’, ‘화관’, ‘황진이’, ‘불멸의 함성’, ‘사상의 월야’ 등을, 수필집 ‘무서록’과 문장론 ‘문장강화’ 등을 발표했다.

문학동인 ‘구인회’에 참여하는 등 20여년간 창작을 이어오던 그는, 1946년 8월 월북했다가 1956년 임화, 김남천 등과 함께 숙청당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듬해 남한에서도 월북 작가로 규정돼 작품의 교과서 수록 및 출판 판매가 금지되면서 1988년 해금 전까지 30여년간 남북 양쪽 모두에서 외면받았다. 그 긴 시간, 그는 남도 북도 아닌 어느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마치 ‘복덕방’의 안 초시처럼.

“추석 가까운 날씨는 해마다의 그때와 같이 맑았다. 하늘은 천리같이 트였는데 조각구름들이 여기저기 널리었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말린 옥양목처럼 흰빛이 눈이 부시다. 안 초시는 이번에도 자기의 때 묻은 적삼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매 끝을 불거나 떨지는 않았다. 고요히 흘러나리는 눈물을 그 더러운 소매로 닦았을 뿐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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