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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 쏟는 처연한 복수 … “부디 거울삼아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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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2-16 17:00:00 수정 : 2023-12-17 16: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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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는 中 원나라 고전 원작
연출가 고선웅 특유의 해학에 명연기 어우러져
지난 11월 개막 여섯 번째 시즌도 전석 매진 행렬

20년 동안 이를 갈며 불구대천(이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의 원수를 처단했는데 전혀 후련하지 않은 사내. 그놈의 대의명분과 의리가 뭐라고 처자식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채 복수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건만 통쾌하기보다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동안 백발 노인이 된 사내의 주름진 얼굴에는 처연함이 가득하다. 그의 이름은 ‘정영’.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극단의 대표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정영의 피눈물 나는 삶을 중심으로 관객에게 많은 감동과 생각할 거리를 안긴다. 

 

의리와 약속 때문에 복수의 씨앗이 될 조씨고아를 살리려고 늦둥이 외아들의 목숨을 대신 내준 ‘정영’은 피눈물을 흘린다. 정영 역을 맡은 배우 하성광의 빼어난 연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국립극단 제공

이 작품은 중국 원나라 시절 고전이자 ‘동양의 햄릿’으로 불리는 비극 ‘조씨고아’를 스타 연출가 고선웅(55)이 2015년 각색하고 연출해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자마자 평단과 관객의 극찬을 받았다. 그해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의 대상·연출상·연기상 등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이듬해 중국 베이징 국가화극원 대극장에서 공연할 때도 현지 관객과 언론은 자국의 고전을 재창작한 한국판 ‘조씨고아’에 찬사를 보냈다. 권선징악이란 다소 진부한 소재이지만 고선웅 특유의 해학과 미감이 입혀지고, 초연부터 정영 역을 도맡아온 하성광 등 주·조연 배우들의 명연기가 어우러진 결과다. 연극적인 말맛과 장면 전환, 무대 연출 등도 보는 맛을 더한다. 초연 이후 2021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평균 객석점유율 93%를 기록했고, 지난달 30일 개막한 여섯 번째 시즌 역시 배우 김혜수가 관람 후 기립박수를 치고 박보검도 보고 가는 등 전석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극장 3층의 시야제한 좌석까지 풀었을 정도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늦둥이 외아들을 대신 내어주려는 ‘정영’에게 아내(이지현)는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깟 의리가 뭐라고!”라며 격노하고 오열한다. 국립극단 제공
멸족을 당한 조씨 집안의 공주(우정원)가 자결하기 전 ‘정영’에게 꼭 살려서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갓난 조씨고아를 맡기는 장면. 국립극단 제공

극은 권력에 눈이 먼 진나라 대장군 ‘도안고’(장두이)가 어진 재상 ‘조순’(유순웅)을 반역자로 몰고 어리석은 황제(이영석)가 조씨 가문의 멸족을 지시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조씨 집안에 은혜를 입은 떠돌이 의사 정영은 ‘공주’(우정원)의 부탁으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이형훈·박승화)를 살리기 위해 애쓴다. 이 과정에서 조씨고아와 비슷한 시기 태어난 늦둥이 외아들을 죽이고 아내(이지현)마저 잃는다. 공주와 은퇴한 관료 ‘공선저구’(정진각), 진나라 장군 ‘한궐’(호산) 등 여러 사람도 도안고의 칼날에서 조씨고아를 지켜내기 위해 잇따라 자결한다. 특히, 정영이 조씨고아를 살리려 제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아내와 ‘처절하게’ 옥신각신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미어지고 눈시울을 붉히는 관객이 많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출연진과 고선웅 연출(아랫줄 오른쪽). 국립극단 제공

정영은 조씨고아를 아들 ‘정발’로 키우며 도안고의 양자가 되게 하는 등 20년 간 와신상담한다. 무예가 출중한 청년으로 자란 정발에게 감춰온 비밀을 모두 털어놓은 그는 복수를 촉구한다. 정발이 “아버지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주저하자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가면서까지 밀어붙인다. 결국 정발은 도안고에게 철퇴를 가하고, 황제는 이번엔 도안고의 구족을 멸하기로 한다. 

 

순간 정영은 허탈감에 휩싸인다. 혈육을 내주는 등 20년 간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복수를 완성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늙은이에게는 할 일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네요”라고 읊조릴 뿐이다. 그는 아내와 조순, 공주, 공손 노인, 한궐 등 망자의 영혼들이 나타나자 반갑게 다가간다. 하지만 모두 기뻐하기는커녕 무표정으로 정녕을 외면한 채 지나친다. 안타깝고 허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극 마지막, 공연 내내 아무말 않은 채 인물들이 죽을 때마다 나와 망자의 퇴장을 인도하던 ‘묵자’(전유경, 원작에 없는 설정임)의 한마디는 큰 울림을 준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분노와 원한, 복수와 응징은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니 누구든 애당초 그럴 일을 만들지 말고 평화롭고 즐겁게 살라는 당부로 들린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개인·집단·진영·민족·국가 간 증오와 적대, 보복, 전쟁 등으로 골병이 드는 오늘날에 더 와닿는다.  

 

고선웅 연출은 서울 공연 100회 기록을 세운 지난 2일 무대에 올라 “관객 여러분 모두 우환 없이 무탈한 인생을 사셨으면 좋겠다”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조씨고아 팀은 늘 타성을 경계하고 정진하면서 관객에게 좋은 연극으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국립극단 제공

막이 내리고 출연진이 나와 인사하는 커튼콜(부름갈채) 때도 그 누구보다 정영의 얼굴을 마주하면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글썽거린다. 극장 문을 나서도 금방 다시 보고 싶어지는 연극이다. 25일까지 공연.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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