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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길목에서 고즈넉한 ‘신들의 숲’을 걷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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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2-03 13:52:02 수정 : 2023-12-03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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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93호 강원 원주 ‘신들의 숲’ 성황림/1100년 역사 신성한 숲 여겨 ‘금줄’로 통제/성황당 둘러싼 노거수 전나무 늠름/수북하게 쌓인 낙엽 “사각사각” 밟으며 힐링/붉은벽돌로 지은 용소막 성당도 낭만 가득/섬강·남한강 만나는 흥원창 낙조보며 만추마저 떠나보내

원주 성황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 (중략) …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의 대표작 ‘나목(裸木)’. 시인은 이파리 우수수 떨어져 앙상한 마른 가지만 남은 나무를 보고 쓸쓸한 인간의 삶을 느꼈나 보다. 나목처럼 고달픈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척하지만 때론 처절한 슬픔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운 단풍 제대로 즐길 겨를 없이 낙엽은 쌓이고 나무는 맨몸으로 울어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우리 인생처럼 계절은 오고 또 가는 것을. 겨울이 오는 길목, 나목들 앙상한 가지 얽히고설켜 부둥켜안고 우는 성황림에 섰다.

성황림 입구.

◆신성한 숲에서 즐기는 고즈넉한 정취

 

강원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황림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에 새끼줄이 늘어졌다. 왼새끼를 꼬아 백지를 드문드문 끼운 것을 보니 신성한 곳임을 뜻하는 ‘금줄’이다. 예전엔 아이를 낳으면 집집마다 대문에 금줄을 걸곤 했다. 아들이면 왼쪽으로 꼰 새끼줄에 숯덩이와 빨간 고추를 드문드문 끼우고 딸이면 숯덩이와 생솔가지를 꽂았다. 빨간 고추와 검은 숯은 악귀를 쫓거나 잡귀를 흡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간장을 새로 담글 때 상하지 않고 맛이 좋기를 기원하며 장독 윗부분에 금줄을 두르기도 했다.

성황림입구.
성황림 낙엽.

마을 어귀, 당집, 당나무 등 신성한 구역에도 어김없이 금줄을 걸고 사람들의 발길을 금했다. 신의 영역에 인간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생길 수 있는 부정을 막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간절한 마음에서 생겨난 풍습이다. 천연기념물 제93호 성황림도 그런 곳이다. 신림(神林)이란 지명에서 드러나듯,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성황림을 ‘신들이 사는 숲’으로 여길 정도로 신성시했다. 대동여지도에도 ‘신림’이란 지명이 등장하는 숲은 1100년 역사를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에는 출입문이 자물쇠로 잠겨있지만 마을 이장에게 미리 연락하면 외지인도 숲을 둘러볼 수 있도록 개방한다.

성황림 개울.
성황림 금줄.

신들의 숲이란 이름에 걸맞게 입구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하다. 폭은 넓지만 깊지 않은 개울이 왼쪽으로 잔잔하게 흐르고 이리저리 휘어진 길을 따라 나무들이 울창하다. 뼈대를 고스란히 드러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키며 하늘로 뻗어 나가는 모습엔 신비로움마저 느껴진다.

 

사람의 발길을 통제하는 덕분에 이파리들이 수북하게 쌓인 숲길을 따라 걷는다. 찾는 이 거의 없어 고요하고 들리는 건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뿐이라 낭만이 가슴에 고스란히 쌓인다. 성황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온대낙엽수림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5만4314㎡ 규모 숲에는 각시괴불나무, 음나무, 졸참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가래나무, 쪽동백나무, 들메나무, 박쥐나무, 산초, 보리수, 광대싸리, 복분자딸기, 찔레, 노박덩굴, 으름덩굴 등 90여종이 울창한 숲을 이뤄 학술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성황당.
성황당.
성황림 표지석.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면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당집인 성황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성황당을 에워싼 나무와 ‘성황림’이라 적힌 표지석에도 금줄이 걸렸다. 유독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성황당 오른쪽에서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간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자라는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인 300년 수령 전나무. 키 29m, 둘레 약 4m로 어른 4명이 두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우람한 걸 보니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으로 여길 만하다. 치악산 성황신이 이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성황당.
성황당 전나무.

성황당 왼쪽 나무는 음나무로 전나무는 남서낭, 음나무는 여서낭이다.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4대째 숲을 지키고 있는 고계환(63) 숲해설사는 “예전부터 당집 주변에는 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나무에 가시가 많아 잡귀가 접근하지 못한다고 여겼다”고 귀띔한다. 두 나무를 중심으로 복자기나무, 갈참나무, 느릅나무 등이 마치 임금 앞에서 도열한 신하들처럼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신성한 숲으로 여겨 성황당을 중심으로 이런 나무배치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 마을 사람들은 100년 넘게 매년 4월8일과 9월9일에 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

수액 자국.
성황림 소나무숲 명상.

수액이 잔뜩 흘려내려 붓으로 칠한 듯 몸통에 하얀 자국이 또렷하게 새겨진 나무들을 지나면 소나무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인간의 영역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눠 먹으며 정을 나누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성황림 소나무숲.
용소막성당.

◆섬강·남한강 만나는 흥원창 노을 보셨나요

 

성황림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용소막성당도 고즈넉한 정취를 즐기기 좋다. 풍수원성당과 원주성당에 이어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성당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이국적이라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처음에는 초가로 지었는데 시잘레 신부가 1915년 가을에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 성당으로 새로 지었다. 건축기술, 재료,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었기에 프랑스 성당 종탑과 아치 디자인 정도만 살렸지만 값진 유산으로 평가된다. 지붕 꼭대기의 뾰족한 탑이 매우 인상적이다. 일제가 종을 공출하고 6·25전쟁 때 북한군이 창고로 사용하는 등 수난도 겪었지만 오랜 세월 한자리를 잘 키기고 있다. 용소막 마을은 지형지세가 용의 형상을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현재 용소막성당 자리가 용의 발부분에 해당하며 그 뒷산이 용의 머리 형상이다.

흥원창.
흥원창 저녁 노을.

고즈넉한 원주 낭만여행 끝에는 아름다운 흥원창 노을이 기다린다.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은 횡성군 태기산에서 발원해 횡성을 거쳐 원주를 지나는데 남한강과 만나는 부론면 흥호리에 조선시대 최대 조창이던 흥원창이 있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12조창 중 하나로 남한강 상류에 있어 원주, 영월, 평창, 횡성, 정선, 강릉, 삼척, 평해 등에서 모은 세곡과 특산물을 보관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서히 떨어지는 해가 섬강과 남한강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무성하게 핀 갈대까지 어우러지니 이제 늦가을 끝자락마저 떠나보내야 하는 가슴에도 무성한 미련만 남는다.


원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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