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美·中 수교 발판 마련
‘셔틀 외교’로 중동평화에도 기여
‘竹의 장막’ 걷어내고 데탕트 이끌어… “냉전 시대의 등불”
나치 피해 美이민 간 유대인 출신
닉슨·바이든 등 12명에 정책 조언
베트남전 종전 공헌 ‘노벨평화상’
강대국 중심 ‘힘의 정치’로 논란
DJ 도쿄 납치사건 땐 구명 나서
최근에도 깜짝 방중… 시진핑 만나
좋아하는 스포츠로 ‘외교’ 꼽기도
“中·美관계 살아있는 화석” 조명
푸틴 “실용주의 외교로 긴장 완화”
한국 외교부도 유족에 조전 보내
‘외교의 전설’로 불리며 평생 세계를 누빈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키신저 전 장관의 국제외교정치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어츠는 이날 “존경받은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키신저가 11월29일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2명의 전·현직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정책을 조언했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리처드 닉슨 행정부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 등으로 일하며 미국의 현대 외교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과 중국이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 등을 주고받으며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던 지난 7월20일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 베이징을 깜짝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당시 1년 가까이 두문불출 중이던 시 주석은 키신저 전 장관을 친히 맞고 “중국은 오랜 친구를 결코 잊지 않으며 중·미 관계는 항상 헨리 키신저의 이름과 연결될 것”이라고 환대했다. 100세 생일(5월27일)을 넘긴 키신저 전 장관은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인시킨 순간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키신저 전 장관은 1938년 가족과 함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서 초강대국 외교의 거인으로 우뚝 선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으로도 불린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독일군의 마지막 대반격으로 유명한 벌지전투에서 독일군 공격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자청해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역 후 하버드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키신저 전 장관은 1950년 최우등으로 학부를 졸업했다. 학부 졸업 논문 ‘역사의 의미: 슈펭글러, 토인비, 칸트에 대한 성찰’은 약 400쪽에 달해 하버드대가 학부생의 논문 분량을 제한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9년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고, 국무장관을 거쳐 후임 포드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미국과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시도, 1972년 5월 미·소 양국 간 핵무기 배치를 동결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도출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되자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키신저 전 장관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나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마오쩌둥 주석과의 미·중 정상회담, 양국 수교 문제 등을 논의하고, 실현시켰다. 키신저 전 장관이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고 미·중 수교의 발판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키신저 전 장관이 개입, 이스라엘과 이집트 관계 개선을 위해 두 국가를 오가는 ‘셔틀 외교’를 통해 휴전을 이끌어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베트남전 종전에도 관여했다. 1973년 1월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와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남·북 베트남, 미국 사이에 종전을 선언하는 파리평화협정을 성사시켰다. 키신저 전 장관은 그 공로로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다만 1975년 레득토가 남베트남을 침공했기에 그의 노벨상 수상은 논쟁을 불렀다. 키신저 전 장관은 이후 상을 반납했다.
강대국 중심의 현실정치 대가로 키신저 전 장관을 둘러싼 논란도 작지 않다. 1971년 이후 100번 이상 중국을 방문할 만큼 친중 인사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89년 6월 톈안먼 학살에 대해 ‘딜레마’라고 표현하는 등 지나치게 중국을 감싸고 돌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동티모르 독립을 막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진압에 눈을 감았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시인 2017년 8월에는 월스트리트저널 기고에서 “워싱턴과 베이징의 상호이해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본질적인 선결 조건”이라며 “아시아 지역의 비핵 유지는 중국에 더 큰 이해가 걸린 사안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담은 미·중 성명이 평양을 고립시킬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키신저 전 장관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북한 정권붕괴 이후 주한 미군 철수를 중국에 약속하면 중국도 북핵 해결에 나설 것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박정희정부가 1971년 미 7사단 병력 철수 이후 1975년 독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자 이를 강력히 막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쿄 납치사건 당시 김 전 대통령의 구명에 나서기도 했다.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키신저 전 장관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 전략가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많지 않다. 2013년 초 뉴욕에서 열린 90세 생일 축하 행사가 이런 평가를 반영한다. 행사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수전 라이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매케인 상원의원,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정·재계 거물이 대거 참석했다. 조지 슐츠, 제임스 베이커, 콘돌리자 라이스,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등 미국의 전·현직 국무장관도 총출동했다.
매케인 상원의원은 “그는 미국과 세계가 가장 혼란스러웠을 때 외교의 등불을 밝혔다”고 축사했다.
최근에도 뉴욕타임스는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의 역사를 조형한 인물”이라며 “전후 가장 강력한 국무장관으로서 그의 업적은 추앙과 매도를 동시에 받는 복합적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독일식 억양, 예리한 재치, 올빼미 같은 외모와 영화배우들과 데이트로 그는 절제로 일관한 전임자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전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면서 “그가 국무장관에 임명됐을 당시 갤럽 조사에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정됐다”고 평가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퇴임 후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외교(Diplomacy)”라고 답했다. 그의 자서전 ‘백악관 시절’은 1980년 전미도서위원회 최고의 역사 서적으로 꼽혔다. ‘미국 외교정책’(1969)’과 ‘외교’(1994), ‘중국 이야기’(2011)는 키신저의 3대 명저로 불린다.

◆“中·美 관계의 살아있는 화석”… 中, 각별한 인연 조명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별세 소식은 세계 각국에서 주요 뉴스로 긴급하게 다뤄졌다.
특히 고인이 1970년대 ‘핑퐁 외교’를 계기로 미·중 수교의 물꼬를 텄던 만큼 중국의 애도 열기가 뜨거웠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3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조전(弔電)을 보내 깊은 애도를 표했다. 시 주석은 조전에서 “키신저 박사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략가이자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 하오펑유(好朋友·좋은 친구)”라며 “키신저라는 이름은 영원히 중·미 관계와 이어져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전했다.
중국중앙(CC)TV는 이례적으로 고인의 생애를 다룬 1분57초 분량의 영상을 보도하며 “키신저 전 장관은 중·미 관계 발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고 평가했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는 이날 키신저 전 장관 별세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 외교부는 키신저 전 장관의 가족 등에게 조전을 발송했다. 고인은 한반도 평화에도 관심을 가져 1975년 유엔총회에서 남북, 미·중 간 4자 회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고인이 2019년 뉴욕 자택을 찾은 정몽준 명예이사장에게 “북한 비핵화는 중국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이며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일화를 전하며 “키신저 박사는 한국 국민의 평생 친구였으며 우리는 키신저 박사와 그분의 현명한 조언을 항상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레믈궁 홈페이지에 올린 애도문에서 “지혜와 선견지명을 갖춘 정치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석해하며 고인의 실용주의 외교 정책이 미·소 데탕트(긴장완화)의 길을 닦았다고 평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X(옛 트위터)에서 키신저 전 장관을 “역사의 거인”이라고 부르며 “한 세기에 걸친 그의 사상과 외교는 우리 시대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는 미국 국민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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