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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인간에 대한 명확한 답변 어려워
전쟁 참상 보며 ‘성선설’ 대한 의문 커져

“선생님은 어떤 종교를 믿으세요? 신앙인이 아니라면 제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실 텐데….” 상담 중에 내담자가 이런 질문을 하면 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같은 심정이랄까. 신앙에 깊은 뿌리를 둔 한 사람의 마음을 일개 개업의에 불과한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내담자의 이런 염려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 종교에 나를 묶어 두고 있진 않다. 무신론자인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신을 믿는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신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라고 믿고 있다.

마주 보고 앉는 책상 하나와 책장 둘이 들어있는 진료실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라고 내뱉게 되는 인생사와 종종 마주치게 된다. 환자 한 명 한 명이 보고, 듣고, 겪었던 운명들을 내 입으로 미주알 고주알 풀어내서는 절대 안 되니, 그걸 글로 옮길 때는 “신이 벌인 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요”라는 표현 외에 달리 쓸 수 있는 말이 없다. 비록 간접 체험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겪은 날은 진료를 다 끝내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 어둑해진 창밖 하늘을 보며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걸어왔고, 앞으로 걷게 될 운명의 길은 신이 이미 다 정해놓은 게 아닐까? 우리는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건, 신이 펼쳐 놓은 그 길을 얼마나 충실하게 걸어가느냐, 하는 것에 달렸겠구나’라는 생각에 닿는다. 비관적 숙명론자처럼 낙담하게는 아니다. 크든 작든 자신에게 주어진 텃밭을 나름대로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꾸미려는 정원사 같은 마음가짐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세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퇴근길에 들러 상담하고 가는 사십대 전문직 여성 내담자가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정신의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얻었지만, 이것이 내가 인간 실존의 심오함을 꿰뚫어보고 그 정수를 말로 풀어낼 줄 아는 탁월함까지 겸비했다는 보증은 아니다. 이런 질문에는 지식이 아니라 질문한 그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야 제대로 답할 수 있다.

상담에서 나눴던 말들과 그녀의 신앙, 가치관, 역사를 더듬어봤다. 어린 학생을 자살로 내몰리게 했던 사건에 자기 가족 일처럼 슬퍼하고 분노했으며, 무고한 시민이 공공장소에서 악인에게 희생되었을 땐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앙심 깊던 그녀는 그녀의 종교가 알려준 원죄와는 상관없이 인간은 본디 선한 존재라는 또렷한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인 수백명이 살해당하고 이어진 전쟁으로 죄없는 민간인 수천명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올 무렵 그녀가 내게 했던 그 질문의 참뜻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은 오류가 아닐까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것이었을 테다.

그 질문이 있기 전의 나라면 “인간 마음의 대부분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회색지대로 뒤덮여 있어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난 “인간은 본디 악한 존재예요”라고 했다. “잘 먹고, 잘 입고, 배우고, 깨우치고, 세상에서 타인과 어울리며, 선한 목적 의식을 가슴에 품고 그것에 어울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인간은 악에서 아주 조금씩 멀어질 따름이에요. 잠시라도 주의하지 않고, 노력을 잠시라도 멈추면 용수철이 당기는 것처럼 바로 악해지는 게 인간이에요.”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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