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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유전자 변형 기술 이용
‘빈혈 치료제’ 영국서 첫 승인
인류의 새 희망 ‘유전자 가위’
과감한 투자·규제완화 필요

1980∼1990년대 생물학의 화두는 단연 유전공학이었고, 그 핵심은 특정 유전자 서열 부위를 자를 수 있는 가위 역할을 하는 제한효소와 아귀가 맞는 유전자 조각을 이어 붙일 수 있는 풀 역할을 하는 리가아제였다. 필자도 1990년대 말 실험실에서 유전자 조각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반복하며 끙끙거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원하는 유전자 서열을 주문하면 유전자 합성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에서 합성해 1∼2주면 배달해 준다.

이뿐이랴. 유전자 염기서열 결정 실험을 위해 허구한 날 유리판에 입김을 불어 가며 윤이 나도록 열심히 닦았다. 당시 염기서열 결정 실험은 유리판 사이에 젤리를 만든 후 DNA를 그 사이로 흘려보내어 정보를 읽었는데 유리판이 깨끗하지 않으면 젤리에 공기 방울이 생겨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차세대 염기분석법으로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수만 개의 유전자를 수 주 정도면 해독한다. 하염없이 유리판을 닦던 나의 젊은 시절은 허무하다.

윤덕현 서울아산병원 카티센터장

실험실에서는 합성한 유전자를 이용하면 된다고 해도 유전병을 치료하려면 병든 유전자를 대체하거나 고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나면 엔진을 통째로 교체하거나 고장난 부품을 찾아 고쳐 쓰면 될 것이다. 척추성근무력증의 치료제인 졸겐스마는 전자에 가깝다. 온전한 유전자를 통째 추가로 삽입해 신경세포에 발현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반면 유전자 가위는 특정 유전자를 변형할 수 있는 기술로 후자에 가깝다.

지난 16일 겸상 적혈구 빈혈 및 베타 지중해 빈혈 치료를 위한 유전자 편집 치료제 ‘카스거비’가 영국에서 조건부 허가됐다 한다. 빈혈도 원인이 다양한데 겸상 적혈구 질환은 헤모글로빈 베타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적혈구가 정상적인 원형이 아닌 낫 모양이 되어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불행 중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는 희귀 질환이지만 서구 및 아프리카에서는 주요 질환 중 하나이다. 일반적인 빈혈처럼 어지럽거나 숨이 찬 정도를 벗어나서 적혈구가 쉽게 깨지면서 황달을 유발하고 뇌경색, 콩팥 및 심장, 간 기능 이상 등을 초래하는 심각한 질환으로 동종조혈모세포 이식만이 유일한 근치법이었다. 그러나 카스거비는 원인이 되는 헤모글로빈 베타 유전자를 교정하기보다는 우회 전략으로 태아 때만 발현하는 정상 헤모글로빈 감마 유전자를 발현하도록 했다. 매우 스마트한 전략을 활용한 유전자 치료법이다.

성인의 경우는 Bcl11a라는 유전자가 발현돼 감마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데 이 Bcl11a 유전자를 파괴하는 전략이다. 유전자 가위는 서열을 올바르게 고칠 수도 있지만 망가뜨리는 방법의 효율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즉, 우회 전략을 사용해서 겸상 적혈구 빈혈 환자의 고장 난 헤모글로빈 베타 유전자 대신 정상인 감마 유전자의 발현을 높여서 기능을 대체하도록 한 것이다. 질환의 병리생태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을 효과적 전략으로 적용한 사례다.

국내에서는 주로 유전자 가위로 알려져 있지만 영어로는 유전자 편집 기술(genome editing)이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 앞에 설명한 것처럼 유전자 편집 기술은 유전자를 망가뜨릴 수도 수리할 수도 있다. 세대를 거듭하여 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 기술이 카스거비의 경우 사용됐다.

다만 위험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크리스퍼 등 유전자 가위는 DNA의 이중나선 모두를 잘라서 낮은 확률이지만 염색체 전위 등 심각한 유전자 이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유전자 실타래가 엉킬 확률이 있다. 다행히 유전자 편집 기술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새로운 유전자 편집 방법인 단일염기편집 기술은 이중나선을 절단하지 않고 하나의 DNA 염기만 치환하는 기술로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롭다. 지난 12일에는 크리스퍼 유전자 염기편집 기술을 이용해 가족성 고콜레스테롤 혈증을 치료했다는 초기 결과가 미국 심장협회 학술대회에서 보고됐다. LDL 콜레스테롤 수용체를 분해하는 PCSK9 유전자를 아데닌 염기 편집기를 이용하여 파괴하는 방법이다.

단일 세포인 박테리아가 바이러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기전으로 가지고 있던 유전자 가위 단백질은 인류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다행히 국내에도 관련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첨단 기술이 또 다른 추격 기술이 아닌 선도 기술이 되려면 과감한 투자와 규제 완화가 필요할 것이다.


윤덕현 서울아산병원 카티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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