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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전시가 하나의 비평문으로… 오늘날 ‘미술비평’ 역할을 반추하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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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20 15:00:00 수정 : 2023-05-20 1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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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연의 스페이스 애프터(SPACE ÆFTER)

비평가 직접 운영하는 전시·연구 공간
정형화된 비평 소비 문제의식서 출발
동시대 미술계 쟁점 연간 주제로 정해
다양한 전시 열고 미술 존재 이유 탐구
‘살아 숨쉬는’ 적극적 평론의 장 선사
미술 비평의 다양한 스펙트럼 선보여

지난해 11월 연희동의 조용한 골목 어귀에 미술 전시 및 연구 공간 ‘스페이스 애프터(Space Æfter)’가 문을 열었다. 영단어 ‘after’의 고어(古語)인 ‘æfter’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 분류를 뛰어넘는 결합과 종횡의 역사를 상징하는 기표다. 한국 미술사의 궤적과 오늘날 미술 현장의 역동성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오랜 주민의 삶과 젊은 방문객의 하루가 교차하는 연희동 환경과도 어우러지는 이름이다.

‘와일드 와일드 매터(Wild Wild Matter)’ 전시전경. 이소요 작가의 작품. 안진균씨·스페이스 애프터 제공

이곳의 운영자는 미술비평가 구나연(47)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에서 예술사 및 전문사 학위를 취득한 후 2008년 제1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문화비평상을 받으며 미술비평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포스트모던 이후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점을 담은 비평집 ‘표류의 미술’(2018)을 펴냈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후 스페이스 애프터를 운영하고 있다.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가 아닌 비평가가 운영하는 장소이기에 전시와 비평의 균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스페이스 애프터는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비평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회답하고자 마련한 공간이다. 오늘의 미술이 짚고 넘어가야 할 비평적 쟁점을 연간 기획 주제로 정해 두고, 기다란 비평문을 쓰는 마음으로 일련의 전시를 선보인다. 각각의 전시마다 도록을 발간하는 대신 1년간 활동에 관한 고찰을 글로 엮은 비평서 출간을 목표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의 ‘물질’에 관해

구나연은 2018년 책에서 저항의 담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시대 미술계의 모습을 ‘표류’의 상황에 빗대었다. 스페이스 애프터는 구나연이 표류의 바다 위에 띄운 고요하고 굳센 섬이다. 항로 없는 항해 끝에 도달한 이 거처는 작품과 전시, 비평의 지속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을 표방한다. 정형화한 관습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나와 마련한 작은 숨구멍과도 같은 장소다.

2022년과 2023년을 관통하는 첫 번째 주제는 ‘물질’이다. 동시대 철학의 화두이기도 한 ‘새로운 물질성’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신체 기관의 물질성이 감각과 사유, 정신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상기하면 물질이란 그 자체로서 경이로운 존재다. 미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물질성을 탐구하는 시도는 작품의 물질성만큼이나 물질 자체의 행위성과 그것이 매개하는 신체 감각 및 정서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물질의 역량과 행위성에 주목하는 존재론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겸허한 세계관을 구축하도록 돕는다. 주제는 ‘인류세’ 및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이후의 반성적 사유와도 연관성을 띤다. 인류세란 지구에 축적된 인류 활동의 부산물을 새로운 지질시대로서 설명하는 개념이다. 팬데믹 이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고하는 시도 또한 활성화했다.

‘와일드 와일드 매터(Wild Wild Matter)’ 전시전경. 고등어 작가의 작품. 안진균씨·스페이스 애프터 제공

스페이스 애프터의 개관전 ‘와일드 와일드 매터(Wild Wild Matter)’는 작가 이소요와 고등어의 2인전으로서 ‘신체’를 핵심어 삼아 열렸다. 전시에서 이소요는 자신의 박사 과정 연구를 위해 필라델피아 외과대학 내 뮈터박물관 유물 보존사로 일한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작품을 선보였다. 박물관이 소장한 다수의 액침 표본은 미비한 보존 처리 탓에 유리병 안에서 서서히 부패 및 분해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신체 조각에 폐기 결정이 내려지면 하수관을 통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절차가 수행됐다. 해당 경험에 대한 기록 및 표본들로 구성된 작품은 인간 의지 바깥에서 순환하는 물질들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한다.

지난 3월에 연 ‘노 지오그래피(No Geography)’는 박형렬과 최선의 2인전으로 마련됐다. ‘매개’를 주제어로 삼았다. 그중 최선의 출품작은 강원 고성 앞바다에서 채취한 소금을 재료로 사용해 제작됐다. 12년 전 일본 요코하마 해변에서 시작된 연작이다. 바다와 토양, 빗물과 산 등 자연 풍경에 내재한 보이지 않는 물질 요소를 소금 결정체로 상징해 드러낸다. 지난 11일에 개막해 다음달 4일까지 계속되는 단체전 ‘고스트 라이트(Ghost Light)’는 ‘빛’의 개념에 주목해 구자명, 손창안, 안진균의 작품을 선보인다. 사진 및 디지털 장치 등에서 신호이자 정보로서 역할을 하는 빛과 이미지의 관계를 고찰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노 지오그라피(No Geography)’ 전시전경. 왼쪽부터 최선, 박형렬 작가의 작품. 박형렬 작가·스페이스 애프터 제공

스페이스 애프터는 일련의 전시를 통해 미술이 물질로서 존재하는 방식 및 작가가 물질에 접근하는 방식을 다각도로 고민한다. 위의 세 전시가 환기하는 신체와 매개, 빛 등의 열쇠말은 모두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물질로서의 미술’에 관한 비평적 고민을 담은 단서다. 미술은 언제나 물질적 신체를 경유해서만 제작되고, 인지된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와 관객, 창작과 비평,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시공을 연결 짓는 매개로서 기능한다. 빛은 우리가 몸담은 시공을 비추어 현재의 물질 세계를 구성한다.

◆미술 속 비평의 맥박을 감지하기

“저와 비슷한 시기에 비평 활동을 시작해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비평의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소비입니다. (…) 작가와 전시를 뒷받침하기 위해 원고 청탁이 오고, 요구된 분량만큼 써서 20여년간 변한 적 없는 원고료를 받으며 지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수동적인 비평 소비 속에서, 정작 적극적인 비평적 담론과 전망을 전개할 기회도 장소도 없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전시 리뷰나 작가의 작품 해석과 분석 등, 특정 틀 안에서 공허한 비평 활동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미술 비평의 힘과 매혹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구나연이 스페이스 애프터 개관을 결심한 것은 미술 현장 속 비평의 역할에 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근현대 미술사를 이끈 것은 비평의 힘이었다. 낯선 창작에 주목하고, 다학제적 사고 및 관점을 모색하면서 한 시대의 미술이 다음으로 나아갈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그러나 실제 현장의 제도 안에서 그 입지는 축소하는 양상이다. 비평적 담론이 부재한 미래를 우려하는 까닭은 창작이 한시적 유행과 상업적 의도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변질되기 쉬운 탓이다. 작가로 하여금 진취적 고민과 창의적 실험을 펼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진중한 연구 및 비평 활동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스페이스 애프터는 전시를 통해 오늘날 미술의 존재 이유 및 비평의 역할을 거듭 질문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내고자 한다. 창작의 언어와 비평의 언어가 차곡히 포개지는 잠시의 시공을 창조함으로써다. 구나연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비평적 논지를 설정하고 이를 평론과 함께 전시할 때, 후행적 비평이 선행적 변화를 생산할 수 있는 메커니즘과 그 장소를 만들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관습적이고 부수적인 글쓰기로서의 비평을 지양하되 전시의 시작과 끝을 아울러 비평적 활동이 살아 숨 쉬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맥박 없는 후행으로서의 비평을 경계하며” 전시의 손목 언저리에서 비평의 생동감을 짚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의 ‘새로움’에게 미술의 존재 이유를 묻기

표류하는 미술의 바다 한가운데 작은 조각배처럼 띄운 구나연의 전시 공간이 세 번째 노 젓기를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다. 독일의 미술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보리스 그로이스의 말처럼 새로움은 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다. 새로운 것의 가치는 언제나 오래된 것에 기반해, 그에 대해서만 낯설도록 드러난다. 새로움을 필연적으로 좇는 미술의 언어는 지나온 역사 속에서 지금의 향방을 모색하고, 굳은 껍질로부터의 탈피를 통해 변신한다. 오래된 알파벳을 의도적으로 취하는 스페이스 애프터의 이름처럼 구나연은 오늘의 미술에 내재한 직관과 사유를 통해 미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근원적 물음에 접근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스페이스 애프터는 연중 전시 외 다양한 부대 행사를 준비 중이다. 여름에는 동시대 한국 미술의 비평적 생태계를 논의하는 라운드 테이블을 마련할 예정이다. 오는 9월에는 조형의 기본 단위인 ‘선(線)’을 주제로 회화의 원초적 물성을 탐구한다. 11월에는 ‘책’을 도구 삼아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논의하고자 한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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