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대단지 아파트 둘러싸여
과거·미래 맥락 고민속 건물 새단장
대지 가운데 마당… 건물 ‘ㄷ’자 배치
대사관의 마당, 유럽의 광장도 닮아
커다란 지붕은 알프스산맥 연상시켜
지붕과 연결 3개의 레인체인 아래
3갈래 물길… 라인·론·티치노강 상징
동네의 역사·기억 담아내는 동시에
스위스와 한국의 조화와 공존 추구
아파트와 대형 교회, 서울시교육청과 한양도성, 어느 하나 만만치 않은 시설들이 주한스위스대사관을 둘러싸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 공관이 광화문이나 정동 같은 업무 지역이나 한남동처럼 프라이버시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을 감안하면 주한스위스대사관은 의외의 장소에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한스위스대사관의 존재감은 확실하다. 마치 서유럽의 두 강대국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이탈리아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스위스 같다.

대사관이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이게 된 건 2003년 이 일대가 교남뉴타운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2006년 ‘돈의문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명칭 변경). 다세대·다가구주택과 군데군데 도시한옥이 있었던 저층 주거지는 뉴타운 사업을 통해 최고 21층 높이의 아파트 30동으로 바뀌었다.
주변 동네의 변화에 맞춰 주한스위스대사관도 새로운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고 국제현상설계를 열었다. 당시 72개 작품이 제출됐는데, 그중 스위스 건축사무소 부르크하르트+파트너(Burckhardt+Partner)가 설계자로 선정됐다. 건물 규모는 연면적 3000㎡로 넓지 않지만 완공까지 5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총괄건축가를 맡은 니콜라 보셰는 뉴타운 사업으로 바뀌는 대사관 주변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스위스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인 제네바에서 태어났지만 이렇게 넓은 면적의 도시 맥락(urban context)이 한 번에 사라지고 생겨나는 상황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가 충격을 받은 돈의문뉴타운은 다른 뉴타운에 비하면 사업 규모가 작은 편이다.
재개발로 주변 도시 맥락이 완전히 바뀌면서 1974년부터 이 땅에 있었던 주한스위스대사관이 동네의 터줏대감이 됐다. 보셰는 새로운 대사관 건물이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고 그래서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동네의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는 과거의 도시 맥락, 구체적으로 이 일대에 있었던 도시한옥과 마당에서 답을 찾았다.

건축가는 대지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경계선을 따라 ‘ㄷ’자 모양으로 건물을 배치했다. 그리고 대사관의 기능과 사용자들의 시선이 마당으로 모이고 햇빛이 마당에서 각 실로 흩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보셰는 새로 완성된 대사관에서의 삶이 과거 이 동네 주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살던 방식과 유사하기를 바랐다. 대문을 통해 마당에 이르고 그다음 각 실로 직접 연결되는 대사관의 공간 구성은 한옥과 유사하다. 한옥에서 마당은 움직임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비어 있을 때 가장 가치 있다. 동시에 대사관의 마당은 직원들의 삶과 외부인들을 위한 행사가 일어나는 장소다. 그래서 대사관의 마당은 유럽의 광장도 닮았다. 광장은 머물러 모이는 공간이기 때문에 비어 있는 공간을 사람들이 채울 때 가장 가치 있다.
대사관 마당 남쪽에는 작은 조경 공간이 있고 바닥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홈이 파여 있다. 지붕과 연결된 레인 체인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홈을 따라 흐르는 과정이 한강을 연상시킨다는 설명이 있다. 3개의 레인 체인 아래에는 라인강, 론강, 티치노강에서 가져온 돌이 놓여 있다. 3개의 돌에서 3개의 물길이 시작되니 각각은 라인강, 론강, 티치노강을 상징한다. 세 강의 발원지는 모두 스위스로 라인강은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북쪽으로 흘러 북해로 빠져나간다. 론강은 남서쪽 프랑스를 지나 지중해에 이르고 티치노강은 남동쪽 이탈리아에서 포강과 합류한다.

스위스에서 발원한 세 강은 서유럽 대륙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관통하며 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에서 문화와 문명이 꽃피는 토대가 됐다. 동시에 세 강이 지나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스위스 문화를 이루는 주요한 축이다. 스위스는 현재 세 국가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세 강에서 가져온 돌과 세 갈래의 물길은 스위스 문화의 기반이자 유럽 문명에서 스위스의 역할을 상징한다.
마당을 둘러싼 입면은 유리 통창과 목재 골조가 사용돼 개방적이다. 이는 적삼목 무늬 노출콘크리트가 쓰인 바깥쪽 벽의 무거운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목재 골조 사이에 삽입된 문틀과 창틀에는 아코야 우드가 사용돼 이 건물이 목구조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이 우리나라 전통 한옥의 목구조를 떠오르게도 하고 건축가의 고향 인근에 있는 쥐라(Jura)산맥의 소나무 숲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마당에 서서 빼곡한 소나무 숲을 상상하다 보면 대사관의 지붕은 자연스럽게 알프스산맥이 된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알프스산맥처럼 대사관의 지붕도 다양한 기능과 행위를 그 아래 품고 연결한다. 동시에 남쪽에서부터 서서히 높아지다 북쪽에서 정점을 찍고 다시 살짝 낮아지는 지붕의 형태는 주변 한양도성과 인왕산을 존중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대사관이 들어선 땅은 국제법에 따라 파견국의 영토로 간주된다. 그래서 대사관은 정치적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파견국과 주재국 간의 상징적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사관의 건물도 주재국에 속해 있지만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주변 맥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만약 그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면 파견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디자인된다. 하지만 대사관의 설치 목적이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는 일, 즉 외교(外交)라고 한다면 대사관 건물은 파견국과 주재국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아 관계의 단초를 만드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자신들의 국경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개방하는 주한스위스대사관은 자신들의 집을 ‘스위스 한옥(Swiss Hanok)’이라고 부른다. 스위스 한옥의 곳곳은 한국적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고 스위스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스위스 한옥’이라는 이름은 스위스인이 해석해서 만든 한옥이기도 하지만 서울 속 스위스를 닮은 집 그리고 한옥에서 발견한 스위스의 면모이기도 하다. 수교 60주년이 되는 올해도 그들은 양국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자신들의 집을 열고 우리를 짧지만 의미 깊은 스위스 여행으로 초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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