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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캐던 노파가 주워 판 참기름병, 국보급 조선백자였다

입력 : 2023-02-21 06:00:00 수정 : 2023-02-21 07: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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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에 얽힌 일화

야산서 발견한 병에 참기름 담아 팔아
중간상인 거쳐 일본인 골동품상 손에

유명 수집가 고이치 유족 경매 부치자
간송이 기와집 15채값 들여 낙찰 받아

한국전 때 北에 반출 위기 간신히 모면
보물 지정됐다가 1997년 국보로 승격

청화·철화·동화 채색법 동시 구현 독특
“조선백자 중 가장 빼어난 美 보인 작품”

경기도 팔당에서 고기를 잡거나 봄나물, 참기름 등을 팔아 생계를 잇던 노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나물을 캐다 흰색 병을 발견했다. 목이 길어 참기름을 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할머니는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서 적당한 크기의 온전한 것들을 골라 사용했다.

야산에서 주워온 병에 직접 짠 참기름을 담아 중간상인에게 1원씩 받고 넘겼다. 중간상인은 광주리장수인 개성댁에게 이를 팔았고, 개성댁은 참기름을 경성 황금정(을지로)에 사는 일본인 부부에게 가져갔다. 단골인 일본인 부인은 이 참기름병에 마음이 가, 개성댁에게 병값으로 1원 더 쳐줘 5원에 참기름을 구입했다. 1920년 초 일이다.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8세기 후반. 높이 41.7cm, 입지름 4cm, 굽지름 13.3cm. 곧게 뻗은 목과 둥근 곡선의 몸체가 빼어나다. 1936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경매에서 일본인들을 제치고 거금을 들여 입수한 것이다. 고미술계에서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간송미술관 제공

일본인 부인의 남편은 골동품상 무라노(村野)였다. 그는 참기름병이 조선백자라는 것을 알아봤다. 무라노는 이 병을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에 팔았다. 얼마 후 스미이 다쓰오(住井辰男)라는 조선백자 수집가가 이를 600원에 구매했고, 스미이는 1932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의 수장품 180점을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출품했다.

경매에서 이 조선백자는 모리 고이치(森悟一)라는 수집가에게 넘어갔다. 낙찰가는 3000원. 모리 고이치는 1908년 대한제국 초청으로 국내에 들어온 금융전문가이자 유명한 고미술품 수장가였다. 그는 수장품을 한 점도 경매에 내놓은 적이 없어서 그에게 명품 조선백자가 많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1936년, 모리 고이치가 죽자 그의 유족은 수장품을 경성미술구락부 주관하에 전시하고 경매에 내놓았다. 그해 11월 20, 21일 이틀간 전시되고, 경매는 22일에 열렸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전시장에서 이 백자를 직접 확인한 후, 경매에 참여했다. 간송은 당시 전 재산을 들여 우리의 국보급 유물들을 지켜낸 인물이다.

 

500원부터 시작된 경매가는 순식간에 7000원으로 뛰어올랐다. 간송의 대리인 신보 기조(信保喜三)가 8000원을 불렀다. 이대로 경매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9000원!”을 외치며 정적을 깬 무리가 나타났다. 야마나카 상회(山中 商會) 관계자들이었다. 야마나카 상회는 일본뿐 아니라 미국, 홍콩 등에도 지부를 둔 세계적인 골동품 회사였다. 이 백자를 두고 야마나카 상회와 간송 사이에 경합이 시작된 것이다. 야마나카 측의 외침에 반응한 신보는 곧바로 1만 원을 써냈다. 이후부터 호가는 500원 단위에서 10원 단위로 바뀌면서 치열한 경쟁을 이어갔다.

간송은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긴 경매 끝에 결국 이 백자를 손에 넣었다. 낙찰가는 무려 1만4580원. 당시 기와집 15채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그때까지 경성미술구락부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였다. 조선백자로서도 역대 최고가였다. 이튿날 ‘경성일보’는 백자 사진과 함께 “조선백자가 1만5000원에 낙찰되었다”고 보도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교육가이자 문화재수집가로 전 재산을 들여 민족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그렇게 간송의 소장품이 된 이 백자는 평온한 시간을 보내다가 한국전쟁 중 북한 인민군에 의해 반출될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도 손재형(1903~1981), 최순우(1916~1984) 선생이 기지를 발휘해 일부러 포장을 늦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63년 이 조선백자는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 병’이라는 명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 마침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국보로 승격됐다.

다채로운 양각 문양, 절제된 화려함, 길고 곧게 뻗은 목 부분과 달항아리를 연상케 하는 풍만한 몸체에 더해, 아취로운 문양 요소들이 조화롭게 표현된 이 병은 18세기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했던 경기도 광주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에서 만들어졌다. 할머니가 병을 주워 온 곳은 분원 가마터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조선백자에서 선보인 모든 안료가 사용되어 문양이 다채롭게 구현된 명품 중의 명품이다. 특히 양각 기법을 이용하여 도드라진 문양들 위에 청화(산화코발트가 섞인 푸른색 안료), 철화(산화철이 섞인 붉은색 안료), 동화(산화동이 섞인 갈색 안료) 등을 곁들여 채색 장식한 조선백자는 유례가 드물어 학술적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 기물에 청화, 철화, 동화 세 안료를 쓴 예는 극히 드물다. 이 안료들은 각기 성질이 달라 소성 온도나 가마 환경 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 등 제작 과정에서 몹시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당시 도자를 장식하는 기법 중 가장 고난도 기술이 적용된 셈이다.

백자 사진과 함께 ‘조선인이 만든 철사 대병 1만5000원에’라는 제목을 단 1936년 11월 23일자 ‘경성일보’.

문양의 구성을 살펴보면, 세 가닥으로 피어난 난초는 양각한 후 그 부위에 청화 안료를 칠했고, V자 형태로 뻗은 국화 가지 또한 양각한 후 철화 안료로 진하게 채색했다. 국화꽃은 난초 주변에 한 송이, 그 위로 세 송이를 균형감 있게 배치했는데, 동화와 철화로 갈색과 붉은색 국화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또 국화꽃 하나에는 아무런 색도 입히지 않고 바탕 백색 그대로 자연스레 남겨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색의 국화는 양각의 도드라진 기법으로 입체감을 형성하고 순백색의 바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된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준다. 국화꽃 위를 나니는 두 마리 나비 또한 정교하게 양각됐고, 몸통과 날개 끝마디 부분에만 옅게 색을 주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격조 있는 초충문이 완성된 것이다. 국보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은 당시 기술로는 최고 경지에 오른 조선백자의 면모와 예술적 품격을 한눈에 보여주는 수작이다.

원로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은 이 병을 놓고 “물에 뺀 듯한 늘씬한 몸매의 곡선과 배자유(胚子油) 색깔이 보여주는 은은한 기품은 비교할 만한 대상이 또 없을 만큼 뛰어나다”며 “당시 조선백자 중 가장 빼어난 미를 보여 준 작품”이라고 예찬했다.

조선 건국 후 성리학 중심의 국가 정치이념과 지배 체제가 들어서면서 조선 왕실 및 사대부들의 취향도 화려한 고려청자 대신 순백의 조선백자로 바뀌었다.

17세기 들어 청화백자에 쓰이는 산화코발트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철화백자가 왕실용 그릇으로 사용되었지만 이때도 한 가지 색상의 장식만 사용했다. 그런데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 제작된 18세기 상황은 조금 달랐다. 왕실용 그릇 제작을 담당하던 사옹원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장인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개인적 그릇 만들기가 허용되면서 사대부들의 취향도 도자에 적극 반영된 것이다. 산수, 화훼, 초충, 시문 등 문인화의 주제들이 청화백자의 문양 소재로 유행했다. 두 가지 이상의 채색 안료 사용, 기면을 뚫어내는 투각, 문양을 도드라지게 하는 양각 등 새로운 시도들도 나타났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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