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온기 가득 담은 '밥' 한 끼… 모락모락 '퍼'지는 행복 [밀착취재]

, 세계뉴스룸

입력 : 2023-01-24 11:30:00 수정 : 2023-01-24 10:47:4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35년간 노숙인·노인들에 무료급식 이어온 ‘밥퍼’

오전 9시가 되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의 ‘밥퍼’는 바빠진다. 많게는 하루 800인분의 식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해야 한다. 기자가 찾은 3일에도 30명 남짓 직원과 봉사자가 새해맞이 식사를 준비했다. 메뉴는 떡국과 만두, 잡채 그리고 김치. 오전 10시쯤부터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낮 12시쯤 시작되는 배식까지 음식 준비가 늦는다고 재촉하는 사람은 없다. 적막했던 곳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음식이 식탁에 오르자 이내 숟가락질 소리로 가득 찼다.

노인들이 점심 시간을 앞두고 밥퍼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식판을 받아 든 한 노숙인이 밥을 받자마자 조용히 가방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가방 속 위생 비닐을 펼치더니, 밥과 반찬의 일부를 넣었다. 저녁에 먹을 밥을 미리 챙겨가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밥이 모자랄 수 있으므로 제지해야 하지만 그러지는 않는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을 불편해하는 노숙인도 있다. 구석에 앉아 식사하거나, 건물 밖으로 나가서 몸을 숨긴 채 식사한다. 직원들이 편하게 앉아 식사할 것을 권해도 그러질 못한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 당시 집밖으로 내몰린 가장들, 사업 실패 후 회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빚쟁이가 잡으러 올 수 있다”며 마음 편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세상이 변했다”고, “이제는 괜찮다”고 위로해도 마음속 깊은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밥퍼에서 한 노인이 점심 식사를 하는 모습. 밥퍼는 이날 새해를 맞아 떡국과 만두, 잡채 그리고 김치를 준비했다.
한 노숙인이 밥퍼에서 저녁에 먹을 밥과 반찬을 비닐에 담고 있다.

밥퍼의 문을 두드린 사람 중에는 대학생도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학생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자리를 잃었다. 자취방 보증금까지 다 써버리자 가방만 짊어진 채 거리로 내몰렸다. 밥퍼를 찾은 학생은 보름 동안 봉사활동을 하며 끼니를 때웠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상대빈곤율(65세 이상 노인 가구 중에서 소득이 중위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가구의 비율) 1위를 차지했다. 2021년 기준 37.6%로 가입국 평균치의 약 세 배 정도다. 밥퍼를 찾는 사람 대부분 노숙인일 것 같지만 동대문구에 노숙인 등록자는 4명뿐이다. 사실 밥퍼를 찾는 사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노인이다.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가 밥퍼에서 점심 식사 전 노숙인, 노인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밥퍼에서 직원이 대형 솥에서 잡채를 조리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 무료급식소 밥퍼에서 직원들이 무료급식 준비를 하고 있다.

밥퍼를 찾는 대다수 노인은 동대문구 밖 다른 지역에서 온다. 만 65세 고령자의 지하철 이용이 무료인 덕분에 꽤 먼 지역에서도 밥퍼를 찾아올 수 있다. 과거에는 밥퍼 규모가 작아 준비할 수 있는 식사량보다 찾는 이가 더 많았다. 그래서 타 지역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거주 지역 무료급식소를 이용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한평생 살아온 동네,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 동네의 무료급식소에 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밥퍼를 찾는 노인 중에는 자녀가 있는 이들도 많다. 자식에게도 배곯는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러워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다. 밥퍼는 사정도, 이유도 묻지 않고 밥을 주며 찾는 이의 자존심을 지켜준다.

밥퍼에서 노숙인과 노인들이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 모습.

노숙인, 노인, 일자리를 잃은 청년, 실패한 가장. 밥퍼를 찾는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분위기를 해치고 주위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더러운 사람은 없었다. 지금껏 우리가 외면했던 보통 이웃의 평범한 모습일 뿐이었다.

‘이 땅에 밥 굶는 이 없을 때까지’. 밥퍼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문구다. 1988년 청량리역에서 라면을 나눠주던 이들은 2023년인 지금도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밥 굶는 이웃을 위해 밥을 푸고 있다.


글·사진=최상수 기자 kilr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비지 은하 '완벽한 미모'
  • 비비지 은하 '완벽한 미모'
  • 임수향 '여신의 손하트'
  • 강소라 '출산 후 3년 만에 복귀'
  • 송혜교, 블랙 원피스로 완성한 동안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