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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누가 고통의 서사를 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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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2-09 22:49:12 수정 : 2022-12-09 22: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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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인생을 망가뜨리는 악마
권태로운가… 좋은 삶 누리는 것

아프면 비명을 지른다. 누군가가 일부러 놓은 농약 묻은 미끼를 삼킨 개가 밤새 선 채로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을 때 함께 괴로워하며 새벽을 맞은 적이 있다. 아플 때 비명을 지르는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비명은 몸에서 일어나는 통증 반응이다. 안락한 삶을 가로막는 요소는 여럿일 텐데, 그중 하나가 의미의 영역으로 편입되지 않는 통증이다. 몸을 갈가리 찢고 으깨는 통증이라면 더욱 그럴 테다. 통증은 생의 약동과 에너지, 그 밝음과 쾌활함을 갉고 신경망을 찢고 부순다. 이것은 비명과 오열을 부르고, 삶을 망가뜨리는 악마의 웃음이다. 통증이 몸을 지배하는 한 그 주체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장애 후유증으로 찌르고 찢기는 경험을 담은 서사는 통증의 위력이 전이되는 강렬한 느낌과 함께 같은 처벌을 받고 있다는 착란 때문에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날것의 통증에 집중포화를 당하는 신체의 고통을 그린 황시운의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교유서가)를 읽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 끔찍함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이것은 몸의 지각과 의지 분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수시로 몸으로 밀려드는 날것의 통증에 관한 이제껏 보지 못한 생생한 서사다.

통증이 신체에 작용하는 물리적 고통이라면 이 책은 우연한 추락사고로 하반신 마비에 빠진 촉망받는 작가의 “인생을 찢고 부수고 으깨”진 불운과 신경병증성 통증에 관한 관찰 기록이고, “불행과 불운에 온몸으로 맞”선 투쟁이며, 안간힘을 다해 세상에 다시 나와 소통에의 갈망을 보여준다. 작가는 척수손상을 입고 통증의 먹잇감으로 던져진 몸을 제시한다. 통증의 불가해한 위력은 비장애인이 범접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기연민이나 나르시시즘이 틈입할 여지가 없이 몰아치는 통증의 파노라마 앞에서 인간은 다만 무력할 뿐이다.

통증은 우리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호명한다. “살을 찢고 뼈를 갈아내는” 통증으로 몸이 무너지고 삶에의 의지가 사라진다.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죽음을 바라게 만드는 통증은 통제할 수 없는 규율 권력이고, 아주 나쁜 방식의 예속일 것이다. 범속하게 말하자면 통증은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이고, 몸의 자기지각을 강화하는 특별한 형식의 테러다. 다른 한편으로 통증은 주체에게 자아의 윤곽을 부여하고, 현존의 의미와 질을 규정하는 표준으로 작동한다. 과연 통증에 노출된 몸으로 사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에 연루된 채로 살아간다. 고통은 누구나 겪는 보편의 경험이고,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대상화하고 그것과 근원적 거리를 유지한다. 통증을 숙고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고통을 모르고 그 본질도 깨닫지 못한다. 고통을 숙고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작은 죽음이다. 죽음은 큰 고통이다.” 아, 알겠다! 우리가 고통을 견디고 삶을 잇는 까닭은 더 큰 고통인 죽음을 피하기 위함인 것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통증은 순간마다 찢기는 살이고, 날마다 들이켜는 죽음이다. 결국 통증은 삶이 너덜너덜 찢기고 비루해지는 요인이다. 통증은 삶의 전 영역으로 침투해 문제를 일으킬 뿐 아무 뜻도 없다. 통증은 벌거벗은 신체에 각인된 고통의 현현이고, 찰나마다 가시화되는 죽음이며, 현존을 모욕하며 외설로 변질시키는 추문이다.

통증은 과거와 미래를 집어삼키고 실존 자체를 현재에 가둔다. 통증에 갇힌 삶! 누군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그 운명에 분노하고 비명을 지른다. 과연 누가 통증의 촘촘함으로 수놓인 고통의 서사를 읽을 것인가? 권태로운 사람에게 이 고통의 서사를 전해주고 싶다. 그 이유는 권태가 고통 없는 나날이 불러들인 마비이고, 고통을 배제한 안락의 과잉이 만드는 표장(表章)인 까닭이다. 날것인 고통의 낯섦 앞에서 권태는 사치, 부끄러운 과잉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좋은 삶의 최소 조건이 통증과 무관한 삶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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