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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중국공산당, 본격적으로 외교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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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2-04 23:01:36 수정 : 2022-12-04 23: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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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서구 열강들이 1943년 중국과 맺은 일련의 이른바 ‘불평등조약’을 폐기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중공)은 이듬해부터 ‘외교’라는 업무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마오쩌둥은 1943년 12월 아시아에서의 일본과의 전쟁이 최소한 3∼5년은 지속될 것이라 보고 이에 대한 준비 차원에서 대외관계 수립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그가 이렇게 외교를 준비한 것은 전후 세계에 대한 중공의 참여 채비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1944년 5월부터 그는 외신기자들과의 교류를 발판으로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지프 스틸웰 지휘 아래 중국에서 전쟁을 치르던 미군 또한 작전상 중공과의 협력이 불가피했다. ‘적(일본)의 후방지역’을 중공군이 대부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찰과 지원은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이런 이유로 1944년 11월 미군은 처음으로 정보군을 옌안(延安)에 파견했다. 데이비드 베렛이 이끈 ‘딕시대표단’의 방문 목적은 명확했다. 대일본 작전 범위의 확산을 위한 중공과의 전략 수립이었다. 이런 공조는 중공의 대미외교 전략 수립의 계기가 됐다.

1944년 중국 옌안을 방문한 미군 딕시대표단 대표 데이비드 베렛(가운데). 오른쪽이 마오쩌둥, 왼쪽은 주더(朱德). 출처:위키피디아

중공의 대미외교 구상은 군사협력을 기초로 했고, 이후 문화협력 및 교류를 모색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기반으로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도 미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는 구상까지 포함했다. 당시만 해도 이런 구상의 실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였다. 미·영·소의 대중국 외교는 국민당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오쩌둥이 희망적이었던 이유는 시간이 갈수록 중공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우호적·협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중공이 설정한 외교의 핵심 목표도 영향력 확대와 국제협력 증진이었다. 이를 위해 중공은 자신의 점령지에 동맹국 군인과 무장 역량의 진입을 허용한다. 이를 통해 부족한 전쟁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점령지역과 주요 항일전쟁 근거지에 외교사절의 파견과 영사관 설립을 수용했다. 옌안에서 동맹국 기자의 취재활동과 언론사 지부의 설립을 허용하며 중공은 이미지 개선에 적극 나섰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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