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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논쟁 수준이 정치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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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10-05 22:57:54 수정 : 2022-10-05 22: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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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안보 쓰나미 몰려오는데
‘비속어 정쟁’으로 날 새는 여야
저급한 진흙탕 싸움 중단하고
위기 해법 찾는 생산적 논쟁을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이란 말이 있다. 대안 없이 주어진 것을 갖느냐 마느냐의 선택을 뜻한다. ‘소주냐 맥주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소주냐 마시지 않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17세기 영국의 말 대여업자인 토머스 홉슨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에게 말을 빌려주는 사업을 했다. 학생들이 좋은 말만 찾는 데다 거칠게 다루는 바람에 혹사당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마구간 입구에는 부실한 말들을, 안쪽에는 좋은 말들을 매두고선 “입구 쪽 말만 빌려준다”고 했다. 말이 필요한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허약한 말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21세기 우리나라 정치에도 400년 전 홉슨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 중에 불거진 비속어 발언을 둘러싼 여야의 극단적 대립이 그렇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끝없이 이어진다. 윤석열정부 첫 국회 국정감사는 첫날부터 파행으로 얼룩졌다.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사생결단식 치킨게임이 벌어진다.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진영 간 전면전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원재연 논설위원

정치권이 피 터지게 싸우는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 또한 없다. 특정 사안에 대해 여야가 생각을 달리하고, 이것이 논쟁으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으론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양측이 논쟁을 통해 이견을 해소하고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정과 민생에 도움이 되는 여야 간 논쟁은 뜨거울수록 좋을 것이다.

비속어 논란이 그럴 만한 사안인가.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한 발언을 두고 정치권이 보름 가까이 공방을 이어가는 건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생산적인 논쟁이 아니라 상대방을 흠집내기 위한 정쟁에 불과하다. 그 나라 정치 수준은 여야 간에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지적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정치는 4류”라고 비판한 지 27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외려 뒷걸음질쳤다.

대통령 발언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비공개 석상에서의 언급이었다고 해도 신중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발언이 공개된 이상 비속어에 대해선 유감을 표명하고 자기 발언의 진상이 무엇인지 해명했어야 옳다. 어설픈 대응으로 논란을 키운 대통령실이나 여당에도 문제가 있다. 그렇더라도 더불어민주당이 해프닝으로 볼 수 있는 대통령의 말을 꼬투리를 잡아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까지 밀어붙인 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대통령을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하면 될 일이었다. 국익보다 정파적 이익을 앞세웠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 안팎의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여야가 대통령 발언을 둘러싼 정쟁으로 날을 새도 될 만큼 한가하지 않다. 북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탄도미사일을 쏘아댄다. 미국 항모 레이건함이 동해에서 연합훈련을 하고,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 아침에도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과거와는 다른 패턴이다. 그제는 중거리탄도미사일 발사로 도발 수위를 더욱 높였다. 7차 핵실험 준비를 마치고 버튼을 누르는 일만 남았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안보위기를 고조시키는 요인이다. 복합 경제위기까지 맞물렸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3고가 국민 삶을 옥죄고 있다. 제2의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음까지 울린다.

여야가 치열하게 싸워야 할 사안은 바로 이것들이다. 핵무력 정책 법제화 이후 위협 수위를 높이는 북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경제 ‘퍼펙트 스톰’에는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두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심화하는 저출산 고령화, 연금 재정 고갈 등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발등의 불이다. 여야는 소모적이고 저급한 이전투구를 중단하고 실사구시 차원의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기 바란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 한국 정치 수준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원재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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