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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의멜랑콜리아] ‘붕괴’에서 인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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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22 22:59:40 수정 : 2022-08-22 22: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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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
되레 스스로 틀에 가둬 두게 돼
적절한 기만, 행복 조건 된 세상
나의 억압에서의 탈출 도전을

언제든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언제나 다이어트를 막는다. 다이어트의 가능성이 다이어트를 못하게 방해한다. 이게 마지막 떡볶이라는 생각이 이 떡볶이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이 ‘특별한 만남’을 그만두기는 어렵다. 다이어트에 대한 집념이 다이어트의 장애물이다. 다이어트를 하려면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야 한다. 끝내야 하는 것은 폭식이 아니라 금식과 절식이다.

언제든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내 인생’ 사는 것을 지연시킨다. 시스템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님을 감지하지만, 그뿐이다. 시스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불면증은 흔한 증상이다. 우울증도 따라붙는다. 괜찮지 않은 상황을 ‘괜찮다’며 자신을 성공적으로 타이르고 억압한 결과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믿지만, 그 자부심은 내 인생을 살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일 가능성이 높다. 자부심이라도 없으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할 것인가.

삶은 수많은 징후를 숨기고 있다. 그 징후는 대체로 위험하다. 이미 결혼했는데, 아이도 있는데, 갑자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일단 도망쳐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내 자부심까지 앗아갔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박해일)이 한 말이다. 해준은 서래(탕웨이)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도망친 거였다.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내 자부심은 정말 바닥이 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그를 도망치게 했다. 서래 남편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해준은 도망칠 수 있는 빌미를 얻는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마침내 도망칠 명확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진리의 공정이라고 말한다. 진리를 공정하려면 ‘나는 나’라는 자기동일성에서 벗어나 타자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해준이 자부심 운운한 것은 자기동일성 유지를 위한 자기방어이며, 자아 이상 실현을 위한 타자성의 배제다. 서래를 사랑하게 되면 시스템의 법과 규범을 위반할 수밖에 없다. 그가 선택한 것은 위반과 사랑이 아니라, 안정과 시스템으로의 복귀였다. 그는 서래에게 “왜 경찰을 못 믿어요?”라고 질책했지만, 서래는 치안의 사각지대에 있다. 경찰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그녀를 믿어줄 리가 없다. 해준이 서래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면, 자신과의 ‘차이’를 통찰했다면 그는 바디우가 말한 그 ‘진리’를 공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준이 사랑을 억압한 대가로 얻은 첫 번째 ‘자부심’은 자라 도둑을 잡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니어도 해결될 사건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것이다. 그는 가족도 지켰다. 그간 아내는 남편의 금연에 집착했다. 남편 건강이 목적이 아니었다. 성적 능력 유지가 목적이었다. 사랑으로서의 섹스가 아니었다. 심혈관계 건강을 위한 섹스였다. 종내 아내는 몇 가지 단서로 해준의 ‘불륜’을 서둘러 종결짓고 또 다른 남자와 함께 해준을 떠난다. 해준은 붕괴되지 않는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서래가 죽은 후, 해준은 비로소 붕괴된다. 붕괴되었기에 사랑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붕괴가 사랑의 조건이 된다. 붕괴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해준은 붕괴 이후에 ‘삶’을 비로소 살게 될 것이다. 서래를 찾아 바다를 헤맸듯, 방향을 잃는 것, 그것이 인생의 시작이다. 서래가 자신을 ‘미결 사건’으로 남겨주었기에, 해준은 경찰로서의 자부심이 아니라, 진실을 함구하지 않는 겸허함을 갖게 될 것이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서래를 향한 고통이 아니라면, 그는 다른 모든 것이 괴롭고 무기력해질 것이다. 서래를 향한 고통 덕분에, 그 외 무의미한 일들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사랑도, 인생도 없는 고통보다 낫다. 밸런스 게임이다.

사람들에게 가끔 질문한다. 행복하시냐고. 모두들 그렇다고 긍정한다. 그럼, 이 인생, 똑같이 반복해서 살아도 괜찮겠냐고 다시 질문한다. 니체의 ‘영겁회귀’와 ‘운명애’(Amor Fati)를 응용한 질문이다. 모두 기겁을 한다. 손사래까지 치면서 절대로 싫다고 말한다. 자기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안심시키고 단념시킨다. 적절한 기만이 행복의 조건이다. 자기기만을 위해서는 개연성 높은 웰메이드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인과관계가 명확한 삶의 시나리오에 ‘자부심’도 한 모티프가 된다. 유능한 사회인이라는 자부심, 가족공동체를 잘 돌본다는 자부심, 교육열 높은 부모라는 자부심. 시스템 속에 안착한 우리는 이 구조의 희생양이면서 동조자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희생당함으로써 이 구조는 더 비대해지고 강력해진다.

사랑이 떠나자 사랑이 시작되고, 인생이 붕괴될 때 인생이 시작된다는 역설을 ‘헤어질 결심’은 담고 있다. 우리도 이 역설을 모르지 않는다. 모른 척할 뿐이다. 모른 척한다는 것조차 모른 척한다. 이중의 기만이 있어야만 그것을 사실로 간신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붕괴를 마주할 때 겨우 시작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대사를 인용해 좀 더 외설적으로 말하자.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이 없다면, 삶을 산 것이 아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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