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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오늘도 ‘하루’라는 편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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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13 23:00:05 수정 : 2022-05-13 23: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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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화무쌍… 운명은 불확실
수많은 질문 던지며 ‘시간’을 살아

‘인간이라는 말’을 두고 생각에 잠기고, 태양을 자신의 시에서 빼버린 들꿩을 기리는 시를 남긴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를 읽는다. “하루하루는/ 한 장의 편지// 저녁마다/ 우리는 그것을 봉인한다// 밤이/ 그것을 멀리 나른다// 누가/ 받을까”(‘매일’) 반쯤 감았던 눈이 반짝 뜨인다.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을 때 풍경은 눈부시고 내 가슴은 벅차오른다.

이 시로 내 평범한 하루는 평범하지 않게 됐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글쎄요. 과연 나는 누구일까요? 왜 나는 태어났을까요? 왜 나는 저기가 아니고 여기를 걷고 있을까요? 내 가슴은 여전히 궁금한 것들로 들끓는다. 쿤체는 1933년에 구 동독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나는 쿤체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와는 다른 나라, 다른 시간을 산 쿤체에 따르면, 나는 아직 한 번도 모든 문을 두드려 본 적이 없고, 항상 그림자를 달고 움직이며 무지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장석주 시인

우리가 인간의 복잡성과 운명의 불확실성을 다 알기에 80년이란 세월은 너무 짧다. 인간이란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반전과 놀라운 의외성을 품고 있는가? 인간의 뇌 용적으로 인간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인간이란 벽은 높고 그 내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다. 작은 경험의 지혜로는 죽음도 삶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저 삶을 묵묵하게 견디고 죽음을 받아들이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갑자기 엄청난 팽창이 일어나며 무(無)에서 물질과 공간이 밀려나오고, 우주는 은하, 암흑물질, 별, 행성들로 채워졌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광대한 우주의 작고 창백한 푸른 지구라는 행성에서 문자, 책, 인터넷을 만들고 자기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산다. 우주는 왜 뭔가로 채워져 있는가?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우주 비밀과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을 품은 것은 오래전 일이다. 137억년 전 우주가 탄생할 때의 원소로 이루어진 존재, 출생과 죽음 사이에서 울고 웃는 존재, 고작 100년 미만의 기대수명을 채우고 비존재로 돌아가는 게 인간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똑똑했던 것은 아니다. 나무나 동물 뼈를 깎아 창을 만들고, 부싯돌로 불을 피워내는 기술을 익힌 뒤 인간 진화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인간이란 변화무쌍하고, 그 스펙트럼은 넓다.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기르는 어미가 있고 제 자식도 내팽개치는 아비가 있다. 연쇄살인마가 있는가 하면 제 생명을 버려 남을 구하는 의인도 있다. 인간이 나무를 벤다면 나무를 심는 것도 인간이다. 광역 표상이 가능한 정교한 체계를 가진 말로 소통하며, 대지에 척추를 세워 직립보행을 한다. 공동 문화권에서 사회생활을 꾸리고, 자의식을 갖고 자기 기율로서 도덕 기준을 품고 살며, 한편으로 거짓말을 하고, 얕은 꾀로 남을 속여 사기를 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은 우연에 휘둘리고, 엉뚱한 상상을 하며, 연민과 종교와 신념기억 따위에 매달리고, 의미 속을 헤매며 산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취해 삶을 망치는 것도, 비록 엽록소를 합성하지는 못하지만 소금과 후추로 음식에 맛을 더할 줄 아는 것도 인간이다. 아마도 시간을 발명하고 의식한다는 점에서, 또한 시간을 압축하는 기술을 발명하고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놀랍다.

오늘 ‘하루’라는 편지를 받은 건 평범한 일이다. 낮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 우주의 태초를 품은 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 베어져 쓰러진 나무들은 죽고, 거울들은 제 바깥을 비추는 일에 바빴다. 먹고 마시며 기도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옛날 노래를 듣고, 숲에서 새의 노래를 들으며 산책했다. 오늘 답을 얻지 못한 물음은 내일 다시 묻게 되겠지. 어둠이 내리면 나는 오늘 받은 편지를 봉인하고 잠을 잘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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