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뱃속 아이까지 ‘업무상 재해’ 확대… 안전한 일터 목소리 커져 [뉴스 인사이드]

입력 : 2022-03-12 13:45:18 수정 : 2022-03-12 13:45:1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엄마 산재’ 선천성 질환 아이에 희망
2021년 12월 국회 통과… 소급 적용 허용
‘재생산 건강권’ 중요성 알리는 시작점

생식독성 물질 노출된 아빠는 빠져
“성별·임신 관계없이 보상 확대 필요
위험 사업장 조사 등 예방책 수립을”
“우리 아들은 엄마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습니다.” 선천성 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어머니 A씨가 지난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면서 남긴 말이다. 그는 1991년부터 7년 동안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근무했다. 고온에서 녹인 에폭시몰드컴파운드(EMC)라는 화학합성물질을 반도체 칩에 도포하는 일이었다. A씨는 “불량을 막으려면 구석구석 묻어있는 몰딩 재료를 긁어내야 해서 엑스레이 설비에 머리를 넣고 주걱으로 긁으며 청소했다”면서 “늘 독한 냄새가 났지만 마스크도 없이 생산량에 쫓겨 정신없이 일했다”고 회상했다. 임신 두 달 후 퇴사를 하고 낳은 아이는 태변을 보지 못했다. 큰 병원에 가서야 대장에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선천성 거대결장’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아이는 대장 전체를 잘라내야만 했다. A씨는 “저도 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다른 질환도 치료 중이지만 우리 아이만큼은 꼭 산재를 인정받아 나중에 부담 없이 병원에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A씨의 건강손상자녀 산재신청은 현재 심사 중이다.

 

◆“태아 장애도 산업재해” 시행 앞둔 태아산재법

11일 정치권에 따르면 임신 중인 노동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유해요인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망한 경우 이를 산재로 인정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태아산재법)’은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년 1월12일부터 시행되는 이 법은 원칙상 시행일 이후 출생 자녀에게 적용하게 돼 있지만, 소급적용을 인정하고 있어 시행일 이전에 태어난 자녀에게도 일부 적용된다. 특히 시행일 이전까지는 출생 시기와 관계없이 산재신청이 가능하다.

 

이전까지 업무상 재해는 노동자 본인에게 한정돼 있었지만, 태아산재법 통과로 태어난 아이가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조승규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노무사는 “산재는 단순한 보상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닌 건강할 권리를 확인하고 요구하는 중요한 방법”이라면서 “태아산재법은 재생산 건강권이라는 새로운 건강권 영역에 대한 문제 제기의 시작점”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까지 건강손상자녀 산재신청 건수는 총 9건으로, 해당 법 통과 이후 대상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고용노동부의 연구용역 보고서 ‘자녀 건강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 및 자녀 유족수급권 보장방안 연구’에 따르면 생식독성 유해물질에 노출된 가임기 여성노동자는 10만6669명이다.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이 1만2339명 중 선천성 질환 아이는 170명(1000명당 13.9명)이었다. 생식독성 유해물질을 다루지 않는 노동자들이 낳은 아이 중 선천성 질환 아이가 1000명당 10.4명꼴로 태어난 것과 비교하면, 생식독성 취급군이 선천성 질환 아이를 낳을 확률이 33% 높다는 의미다.

◆‘엄마’는 되고 ‘아빠’는 안 된다… “범위 넓혀야”

하지만 이번 법 통과로 모든 피해자가 태아산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 LCD 생산 공정에서 일했던 남성 B씨는 여전히 태아산재법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다. B씨는 지난해 남성 최초로 태아산재를 신청했지만, 이번 개정법에 아버지의 유해노출로 인한 태아산재는 포함되지 않았다. B씨의 아들 지후(14·가명)군은 태아 발달기에 여러 장기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기형이 발생하는 희귀질환인 ‘차지 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다. B씨는 아내가 임신하고 지후군이 태어난 기간을 포함해 7년 동안 생식독성물질 중 하나인 이소프로필알코올(IPA)을 다뤘다. 그는 “일할 때 IPA를 천에 부어 장비를 닦고 헛구역질을 하거나 토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삼성전자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강해 약품 유해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IPA의 위험성을 알게 되고 나서는 나 때문에 지후가 아프게 된 걸까 싶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눈물이 났다”고 전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태아산재법의 범위가 넓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 노무사는 “아버지 태아산재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빠졌다기보다 피해 존재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간과된 것”이라며 “태아산재에 휴업급여, 유족급여, 상병보상연금 등이 적용되지 않은 것도 한계”라고 지적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도 “성과 재생산 건강을 산업재해 예방의 기본 영역으로 둬야 한다”면서 “산재 인정·보상에서도 성별이나 임신,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태아 건강 해치지 않을 안전한 일터를”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요인을 화학물질 등에 한정하지 않고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부 연구용역 보고서는 “생식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의 노출은 단지 화학적 요인뿐 아니라 직업적 사유로 인한 물리적 요인과 사회심리적 요인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면서 방사능·고열 등 물리적 요소와 장시간·교대·야간 근무를 포함한 사회심리적 요소 등도 고려 대상이라고 했다.

태아산재법 제정을 계기로 작업 환경이 자녀의 건강손상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예방적 차원에서 안전한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집행위원장은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생식독성 물질과 피해 사례에 대한 파악이 중요하다”며 “노동자 재생산권과 건강권 보장을 위해 생식독성 사업장 전수조사 시행 등으로 실태를 분명히 드러내고 예방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영 대표는 “화장실, 탈의실, 유니폼, 용모 규정과 같은 노동 환경이 성·재생산 건강에 미친 영향 등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논의해 간다면 산재 이전에 이를 방지하고 예방해야 할 기업과 국가의 책임도 보다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