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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불로소득 폐해 알리려던 보드게임… 대중은 되레 ‘탐욕’에 빠졌다

입력 : 2022-03-01 09:00:00 수정 : 2022-02-28 20: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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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모노폴리’ 탄생에 얽힌 비화

진보적 사고 지닌 30대 미국 여성 매기
‘지주게임’ 발명하고 1903년 특허 얻어

30년 뒤 게임 접한 대로가 일부만 변형
상대방 파산시키는 ‘독점 룰’ 인기 얻어

실업자였던 대로는 백만장자 됐지만
매기는 고작 500달러 받고 소송도 져
자신의 게임을 베껴 만든 모노폴리 게임을 보고 있는 리지 매기의 모습.

한국에 본격적인 보드게임(board game)이 소개된 건 1980년대 초였다. 한국에는 이미 윷놀이라는 사실상의 보드게임이 존재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건너온 이 게임의 룰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판(보드)에 빙 둘러 말이 이동하는 것도, 그 말을 움직이기 위해서 윷에 해당하는 두 개의 주사위를 던지는 것도 궁극적으로 윷놀이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달력 뒷면에 윷판을 그리고 나뭇가지를 반으로 자르기만 해도 할 수 있는 윷놀이와 달리 ‘부루마불’(Blue Marble)이라는 이 게임은 고급스러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흔히 ‘브루마블’로 알고 있지만, 이 제품을 판매한 기업에서는 브루마불이라는 말을 고집했다.

이 게임의 이름을 부루마불, 즉 푸른 구슬이라고 지은 이유는 게임 참가자가 보드 위에 적힌 세계 각지를 여행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브루마불을 갖고 있던 사촌 동생이 “윷놀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했고, 룰도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차이점이 있었다. 홈으로 돌아오는 야구처럼 작동하는 윷놀이와 달리, 부루마불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부동산을 매입하고, 그걸 이용해 다른 플레이어에게 돈을 받아내고, 궁극적으로 상대를 파산시키는 게임이다. 이 게임은 원산지인 미국에서는 이런 게임의 목적에 좀 더 충실한 이름으로 불린다. 바로 모노폴리(Monopoly·독점)다.

지금은 세계적인 게임, 완구회사 해즈브로(Hasbro)가 만들어 팔고 있는 이 게임은 부루마불이라는 카피 제품이 아닌 원래의 상표 그대로 한국에서도 팔리는데, 박스를 보면 게임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흰 콧수염을 기른 노년의 백인 남성이 (흔히 실크 해트라 불리는) 톱 해트(top hat)를 쓰고 있는 그림은 모노폴리 게임 브랜드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톱 해트는 19세기 말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부르주아, 자본가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이 게임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게임이다. 그런데 모노폴리 게임이 묘사하는 자본주의는 열심히 일한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가져가는 건전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발명하거나 노동을 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땅과 건물 같은 부동산을 사서 지대(rent)를 받는 자본주의다. 우리는 왜 이런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 게임을 하게 되었을까.

이 게임의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노폴리를 판매하는 해즈브로의 웹사이트에서는 이 게임을 발명한 사람이 찰스 대로(Charles Darrow)라고 밝히고 있었다. 워낙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게임이기 때문에 이를 만든 대로는 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받아 백만장자가 되었다. 미국이 대공황에 시달리던 1930년대에 실업자였던 그가 보드게임 하나로 큰 부자가 된 이야기는 보드게임계에서 전설처럼 전해져왔다. 문제는 이 게임을 만들어낸 사람이 찰스 대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대로는 1932년에 아내와 함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부동산 보드게임을 알게 된다. 친구 부부가 얼마 전에 배웠다며 알려준 이 게임은 주사위를 굴리며 보드 위에서 부동산을 사며 경쟁하는 룰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게임을 조금 다듬어서 게임과 완구를 제작, 판매하던 파커브라더스(Parker Brothers)에 팔아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알고 있던 스토리다.

리지 매기가 처음 만든 ‘지주 게임’(Landlord’s Game)의 보드. 오른쪽 위의 지구 모양 주위에는 “땅에서 노동을 할 때 임금이 발생한다”는 헨리 조지의 말이 적혀있다. 매기는 헨리 조지의 생각을 이 게임으로 전파하려 했다.

하지만 2015년에 매리 파일론(Mary Pilon)이라는 작가가 모노폴리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을 찾아내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하면서 이 게임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게 되었다. 파일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모노폴리 게임이 만들어진 건 대로가 친구네 집에서 처음 접했던 때보다 무려 30년 전이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낸 사람은 리지 매기(Lizzie Magie)라는 30대 여성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게임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특허를 내지 않았나 보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리지 매기는 1903년에 이 게임으로 특허를 얻었다. 그러나 매기가 이 게임을 발명한 대가로 받은 보상은 단돈 500달러였고, 매기의 게임을 조금만 바꿔서 게임 회사에 판 대로는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여성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창작물을 남성이 가로채어 돈과 명예를 얻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지만, 과거에는 훨씬 더 심했기 때문에 모노폴리 게임의 이야기를 그런 전형적인 사례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역사가 아이러니한 이유는 이 게임이 리지 매기가 이 게임을 만들어낸 이유, 즉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교훈과는 완전히 반대로 발전해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매기는 이 게임에 무슨 교훈을, 왜 넣으려고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매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

리지 매기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1866년에 태어났다. ‘캔턴 레지스터’라는 신문의 발행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제임스 매기는 노예폐지를 주장하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고, 1850년대에 링컨과 함께 (링컨의 정치적 고향인) 일리노이주를 돌아다니며 토론을 통해 대중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뛰어난 연설가였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를 똑 닮았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란 딸이 리지 매기다.

리지 매기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시점이었지만, 그가 성장하던 미국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기업들의 독점 자본의 폐해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보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반독점 사상가로 유명한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주장에 강하게 끌렸다. 진보 경제학자로 유명한 헨리 조지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서만 세금을 걷는 ‘단일세’를 주장했다. 당시에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번 사람의 소득은 건드리지 말고, 노동하지 않고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에게서만 세금을 걷는다는 생각에 동의한 사람들은 매기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기는 그 주장에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당시에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보드게임의 형태로 만들어서 경제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자본의 폐해를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임이 ‘지주게임’(Landlord’s Game)이다. 그는 이 게임에 두 개의 룰을 만들었다. 하나는 부가 창출될 때마다 플레이어가 돈을 버는 ‘반독점’ 룰이고, 다른 하나는 플레이어들이 독점을 추구해서 다른 플레이어를 파산하게 하는 ‘독점’ 룰이었다.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세상에는 이런 두 가지 룰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독점을 통한 재산증식이 어떻게 사회를 파괴하는지 게임을 통해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독점의 룰로 게임을 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고, 1932년에 찰스 대로가 친구 집에 가서 처음 접한 버전도 바로 독점의 룰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파일론에 따르면 대로에게서 게임을 산 게임회사는 대로와의 계약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지 않은 채 리지 매기에게는 500달러만을 주고 입을 씻었다. 대로 버전의 게임이 자신이 만든 걸 고스란히 베낀 것이고, 회사로부터 비교가 안 되는 큰돈을 대가로 받았음을 알게 된 매기는 변호사를 고용해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고, 오히려 더 많은 돈을 소송비용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불로소득의 폐해를 알리려던 사람의 노력이 창작물을 빼앗은 사람에게 더 많은 돈을 벌어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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