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사법부 최고기관인 연방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모두 종신직이다. 자진 사퇴하거나 탄핵을 받지 않는 한 지위가 보전된다. 사법부 독립을 위한 장치다.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과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윌리엄 태프트는 “대통령은 왔다가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고 했다. 대법관은 수십년간 자리를 지키면서 낙태나 총기규제 같은 첨예한 사회적 쟁점의 향방을 좌우한다. 미국 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법관이 ‘최고의 현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미국인 상당수가 대법관의 이름을 알 정도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달 은퇴를 선언한 현직 최고령 대법관 스티븐 브레이어의 후임으로 커탄지 브라운 잭슨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후보다. 대선 공약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대법원이 이 나라 전체의 역량과 위대함을 반영할 시간이 됐다”고 했다. 연설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도 배석했다. 게다가 2월은 ‘흑인 역사의 달’이다. 민주당이 고전할 것으로 보이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흑인 유권자 등 핵심 지지층을 결속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잭슨 판사가 상원 인준을 통과하면 미국의 첫 흑인 여성 대법관이 된다. 지금까지 대법관을 지낸 115명 중 여성은 5명에 불과한데 이 중 소니아 소토마이어, 엘레나 케이건, 에이미 코니 배럿은 현직이다. 흑인 대법관은 서굿 마셜과 현직인 클래런스 토머스 2명뿐이다. 잭슨 판사가 대법관이 되더라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임기 중에 만들어진 보수성향 6명 대 진보성향 3명의 연방대법원 구도에는 변화가 없다.
상원 인준절차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잭슨 판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절에 돈 맥갠 백악관 법률고문이 하원 소환에 응해야 한다고 결정하고, 불법 이민자를 신속히 추방하려는 정책을 기각하는 등 논쟁적인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상원 의석 절반을 차지하는 공화당이 쉽사리 인준하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연방대법원 유리천장에 균열이 생긴 것은 공화당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