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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영원한 진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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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2-25 23:22:56 수정 : 2022-02-25 23: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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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아픈 삶’ 그사람만의 진실
사랑·희생… 깊은 ‘본질’ 통찰해야

남 레, <사랑과 명예와 동정심과 이해와 희생> (‘보트’에 수록, 조동섭 옮김, 에이지21)

인생의 어떤 중요한 순간들은 타이밍과 상황의 문제와 연관돼 있지 않을까.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의 마지막 해, 그 학기 최종 소설을 사흘 안에 제출해야 하는 상황인데 시드니에 사는 아버지가 오셨다. 아들은 아버지가 반갑기보다 당장 써야 할, 그러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소설 때문에 초조하고 아버지와 보낼 시간도 없다. 변호사였던 아들이 돌연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아들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는 “붙잡힌 물소는 자유로운 물소를 미워한다”라는 베트남어 속담을 들려주지만 젊은 아들을 막을 수 없었다. 뉴욕에서 시간을 6분 단위로 썼던 아들은 소설가를 양성하기로 유명한 아이오와 대학으로 옮겨와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한다. 소설이 잘 써지면 좋으련만.

조경란 소설가

아들은 글쓰기 강사나 문학 에이전트에게 조언처럼 느껴지는 말을 들었다. 자신의 배경과 경험이 들어간 ‘소수 민족’ 이야기가 대세라는. 그때 비 내리는 아침에 아버지가 아들 집에 도착한 것이다. 아버지를 보자 아들은 떠올린다. 그래 아버지의 삶, 베트남 보트피플, 대학살에 연루된 아버지 이야기를 쓰는 거야. 아버지가 잠든 밤에 아들은 전동타자기에 흰 종이를 끼워 넣고 타다닥 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버지는 원고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버지는, 왜 나한테 먼저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이야기를 썼느냐고 묻지 않았다. 마감 날짜는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진 아들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서 그 소설을 완성시키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실화를 쓰면 팔 기회가 더 많아진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버지는 이런 속담을 던진다. “주린 배 때문에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아들은 그 말을 바로 받았다. “학자 한 명이 집안을 일으킨다”.

이제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에 나는 한 장편소설을 쓰고나서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친가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나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가장 큰 상처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젊었고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으며 그 친가로부터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간절하다고 믿을 때였다. 이 단편의 화자인 아들은 나중에 이런 고백을 했다. “우리는 부모의 희생을 잊는다”라고. 내 소설이 출간되었다. 어느 밤, 술을 조금 드신 내 아버지가 거실 바닥에 돌아앉은 채 낮은 소리로 짧게 말하였다. 이제 아버지 이야기는 쓰지 말아라. 그 뒷모습은 언젠가 나에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서 그런지 아버지 인생은 실패했구나, 라고 고백할 때와 비슷해 보였다. 나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버지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네, 라고 약속 같은 대답을 했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가족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라고, 그래서 허락도 받지 않고 써도 된다고 여긴 어리석은 시절을 지났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거기엔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는 바로 그 사람만의 고유한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

베트남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남 레의 이 단편은 읽고나도 내용과 더불어 제목에 대해 종종 더 많은 질문과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윌리엄 포크너는 말했다. 영원한 진실을 써야 한다고. 사랑과 명예와 동정심과 이해와 희생(Love and Honor and Pity and Pride and Compassion)에 대해서.

아들은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을 완성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보니 타자기로 친 원고도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책하러 나가던 강둑에서 노숙자와 함께 재가 날리는 석유 드럼통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뒤로 흐르는 강. 아들은 나이가 더 든 후에야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한 것이리라.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시리도록 아프고 아름답다.

사랑, 명예, 동정심, 이해, 희생. 그리고 또 다른 ‘영원한 진실’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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