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등 우익 강행 압박에 신중론 기시다도 급선회
“거대한 中앞서 한·일 으르렁” 美우려 아랑곳 안 해
中 “강제노역, 日 심각한 범죄…주변 아픔 무시 분노”
마이니치 “문화, 정치적 이용 국익해쳐” 日정부 비판

“내년으로 미루면 등록 가능성이 커지는가? (한국이) 역사전(歷史戰)을 걸어오는 이상 피해서는 안 됩니다.”(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페이스북)
일본 정부가 1일 각의(閣議·국무회의)를 열고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을 결정함에 따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역사전쟁’으로 규정한 한·일 갈등이 가열될 전망이다.
일본 정부는 이날 오전 각의에서 2023년 세계유산 등록을 목표로 하는 일본 후보로 사도광산을 추천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일본 정부는 추천서를 이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한다.
일본 정부는 앞서 전날(1월 31일) 세계유산조약 관계 성청(省廳) 연락 회의를 열어 사도 광산을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유네스코에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측은 대상 기간을 에도(江戶) 시대(1603∼1867년)까지로 한정해 일제강점기 역사를 제외한 채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올리려고 하고 있다.

◆아베 적반하장식 ‘역사전쟁 ’ 논리 전개
기시다 정권은 당초 한·일 관계를 고려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추천을 내년 이후로 미룰 수도 있다는 신중한 입장이었으나 아베 전 총리 등 우익 압박에 굴복해 급선회했다.
아베 전 총리는 특히 기시다 총리가 세계문화유산 추천 방침을 결정하기 하루 전날인 1월27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압박했다.
“신중론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항상 같은 논리.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때도 그랬습니다. ‘한국의 반응이’, ‘반론의 준비가’ , ‘미국의 반응이’. 그때 분명 추천해도 등록이 안 될 리스크가 있었지만, 사태는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한국과 합의해 등록했습니다만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년으로 미루면 등록 가능성이 커지는가? 냉정한 판단을 요구받습니다. 역사전(歷史戰)을 걸어오는 이상 피해서는 안 됩니다.”
아베 전 총리는 2015년 7월 나가사키(長崎)현 군함도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시 일본이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음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갈등의 책임을 한국에 떠넘기는 일본 우익 특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당시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interpretive strategy)을 마련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해 조선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brought against their will)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로 노역했다(forced to work)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포메이션센터 설치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약속과 달리 2020년 3월 도쿄 신주쿠(新宿)구 와카마쓰(若松)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오히려 한민족의 강제동원 피해를 왜곡하는 전시내용으로 채워져 갈등이 되고 있다.

◆기시다, 아베에 두 차례 전화 조언 구해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아베 전 총리와 두 차례 통화 후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지난해 12월28일 일본 문화청 문화심의회가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한 뒤 한국 반발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심사 탈락 가능성 등을 고려해 추천을 보류하자는 의견이 주류였다.
이런 기류가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집권 자민당 내 강경파 의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극우 인사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1월19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라고 격분하자, 기시다 총리는 즉시 아베 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했다.
아베 전 총리는 1월20일 자신이 이끄는 자민당 최대 파벌(아베파) 모임에서 “(한국과의) 논전을 피하는 형태로 등재 신청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며 기시다 총리를 압박했다. 아베 전 총리의 이 발언을 계기로 총리관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미국 측에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동맹이 마주하고 있는 지금,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곤란하다”며 우려를 일본 측에 전했다. 사도 광산 문제로 한·일이 대립할 경우 한·미·일 공조의 제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문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가 고민에 빠진 와중에 자민당 강경파가 더 강하게 압박하자 다시 아베 전 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베 전 총리는 “군함도 때는 보수계 박근혜 정부였는데도 한국은 그렇게 시끄러웠다”며 “미뤄봐야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조언했다. ‘암반(岩盤)지지층’을 가진 아베 전 총리는 무시할 수 없었던 게 시다는 결국 사도 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추천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한·중 반발…한·미·일 연대 제한 요인
기시다 총리는 1월28일 기자들을 만나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추천 방침을 밝힐 때 한국의 반발에 대한 대응을 묻는 말에는 “여러 이견, 의견이 있는 것을 알지만, 그러니까 냉정하고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애매한 답변을 했다.
일본 정부는 총력 체제로 나올 전망이다. 기시다 총리는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해 (사도광산의) 역사적 경위를 포함한 다양한 의견에 대한 대응을 강화할 것이다. 등록 실현을 위해 정부가 하나 돼 다뤄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다키자키 시게키(瀧崎成樹) 관방(官房) 부(副)장관보(補)가 TF를 이끌고, 민간 전문가의 지식도 활용해 대응할 예정이다. 다키자키 부장관보는 외무성에서 30년 넘게 활동한 외교 전문가다. 내각관방으로 자리를 옮기기 직전에는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을 지내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 등 갈등 현안을 놓고 한·일 국장급 협의를 한 경험이 있다.
우리 정부는 외교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교육부,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과 민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TF를 구성해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대응할 계획이다.

유네스코에서 영향력이 큰 중국 정부도 일본 정부의 조치에 반발하는 양상이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실은 1월30일 연합뉴스의 서면 질의에 보내온 답변에서 이번 문제와 관련해 “강제노역은 일본 군국주의가 대외 침략과 식민통치 기간에 저지른 심각한 범죄”라며 “분노를 불러올 것”이라고 밝혔다.
대변인실은 "일본은 앞서 유사한 등재 과정에서 일부 유적지에서 아시아 국가 노동자들의 의사에 어긋나는 강제노역이 있었다고 인정하며 희생자를 기리기로 약속했지만 끝내 실현하지 않았다”며 “일본이 이웃 나라의 아픈 기억을 무시하고 새로운 유사 등재를 시도하는 것은 분노와 반대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사도광산은 오늘 일본 정부의 공식 추천 후 2023년 5월까지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심사를 받은 뒤 같은 해 6월 등록 여부가 결정된다.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이날 ‘세계유산과 사도광산, 문화의 정치적 이용이 위태롭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아베 전 총리와 일본 정부의 행태에 대해 “아베 전 총리는 (한국이) 역사전을 걸어오고 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지만 역사 인식에 관한 마찰을 가져와서는 안된다”며 “이웃 나라와 대결 자세를 연출하려는 의도로 문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듯한 행동은 오히려 국익을 해친다”고 일침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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