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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발전 원동력’ 바다… 그 역사 속으로 항해

입력 : 2022-01-22 01:00:00 수정 : 2022-01-21 21: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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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지중해, 교역·문화 등 해상네트워크
동부 페니키아, 그리스 문명에 영향 미쳐
저자, 협력·투쟁 과정 등 거치며 발전 분석

해양 팽창 적극 나서 ‘대항해시대’ 연 유럽
中, 해상서 후퇴… 근대 세계사 전환점 돼
‘항로 대폭 단축’ 운하 개통도 변화 계기
“해양 패권 가진 국가, 세계 패권도 가질 것”
주경철 서울대 교수는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지보다 넓은 바다에서 일어난 일까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기원전 1600년쯤 그려진 그리스 산토리니의 벽화. 벽화에서 당대 미노아인이 선박을 사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바다 인류/주경철/휴머니스트/4만6000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는 척박한 땅을 떠나 세계 각지로 퍼졌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은 물론 대양 너머의 아메리카와 호주 대륙까지 이동했다. 인류 대이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에게 육로만큼이나 해로가 중요했다는 점이다. 수만년 전의 인류가 바다를 어떻게 건넜는가를 두고 학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인류가 터득한 항해 능력은 오늘날까지 지구의 지배종이 되는 핵심요소로 작용했다. 검푸른 바다는 인류의 이동과 소통을 가로막은 장벽이 아닌,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경철 서울대 교수는 육지에 치우친 역사 서술이 ‘반쪽짜리’라고 평가한다.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 표면의 71%를 덮고 있는 바다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대항해 시대’와 ‘문명과 바다’를 집필한 주 교수는 신간 ‘바다 인류’를 통해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해양사를 고찰하고 미래의 항로를 조망한다.

서구 문명의 기원지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서술은 역사의 실상을 왜곡시킬 우려가 크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지중해에는 다양한 민족과 집단이 거주했는데, 이들이 협력하고 투쟁한 과정이 문명 발전의 토대가 됐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그 흐름에서 중심이 된 것은 바로 지중해 바다다.

실제 지중해 동부 페니키아는 바다 건너의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사용한 문자를 ‘페니키아 문자’라고 불렀다. 페니키아와 접촉한 그리스 상인들이 먼저 문자를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저자는 “지중해 세계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진 수많은 네트워크의 집합체들로 구성됐다”며 “고대 지중해는 올리브기름, 포도주, 직물, 도자기, 철, 은 같은 상품이 이동하고 건축, 문자 등 문화 자산이 전달되는 해상 네트워크의 중첩으로 그리는 게 타당하다”고 말한다. 이어 “이 네트워크들은 단단하게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며 “네트워크의 각 마디, 고리 등은 안정적이거나 지속적이지 않고 반대로 가변적이며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했다”고 설명한다.

주경철/휴머니스트/4만6000원

근대로 넘어와선 바다에 대한 통찰력의 차이가 세계 패권의 향방을 좌우했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은 제국주의에서 항해 능력을 기반에 둔 패권 쟁취에 앞장섰다. 이 시기의 유럽은 바다를 통해 세계로 외연을 확장하려 했는데, 반면 중국은 바다 너머의 세계를 자신들의 세계 내부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 시기 해적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어느 시대에나 해적이 창궐하지 않은 적은 없지만, 1500∼1700년대 해적의 기세는 국가 단위를 능가했다. 해적은 약탈을 일삼는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한 대상이었지만, 항로를 개척하는 데 기여한 부분도 있다. 비록 약탈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고, 이는 시장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해상 무역의 기반이 된 셈이다. 더불어 유럽의 해양 세력이 아시아의 해양 질서에 충격을 가하고 변화를 초래하는 과정에서 해적과 같은 ‘비공식 부문’이 공식적인 교역으로는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을 강제로 개방시키기도 했다.

명나라 초기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던 정화의 함선(위)과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함선(아래). 휴머니스트 제공

중국도 넓은 바다를 마냥 등한시 여긴 것은 아니다. 송나라 때부터 해상 교역에 관심을 보였고, 명나라 초기에는 정화(鄭和)가 이끈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이 시기 아랍의 상인들은 동쪽으로 팽창을 시도했고, 인도에는 아시아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촐라 왕조가 들어섰다. 하지만 황제가 바뀌면서 해양 교류가 중단됐고, 바닷길을 막는 해금(海禁) 정책이 펼쳐졌다. 유럽이 해양 팽창에 적극 나서며 대항해시대를 여는 동안 중국은 해상에서 후퇴한 것이다. 저자는 “중국이 해상 후퇴를 했지만 유럽이 해상 팽창을 지속한 것이 근대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며 “당시 유럽이 발견한 것은 대륙이 아니라 세계의 바다였다”고 말한다. 이어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바다에서 상당히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며 “유럽인들은 아시아 내륙에 식민 제국을 건설하기 전에 먼저 바다를 공략했다”고 주장한다.

항로를 크게 단축시킨 운하의 개통은 항해 역사의 전환점이 됐다. 1914년 개통된 파나마 운하는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항로를 단축시켰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간 항해 거리는 2만900㎞에서 8370㎞로 줄었고, 미국은 운하를 통해 광물과 농업 자원을 더 쉽게 유통할 수 있게 됐다.

저자는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해양 패권을 가진 국가가 세계의 패권도 거머쥘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것은 전보다 더 어렵고 치열해질 전망이다. 패권 경쟁의 틀이 더 심화됐고, 이제는 바다 위에서의 전투를 넘어 바닷속에서도 대양을 지배하려는 경쟁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다. “바다는 아무에게나 열린 게 아니라 깊이 공감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숭엄한 공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과학과 기술의 힘을 갖춘 서구 세력만이 바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 이념과 내통하게 되었다.… 해양은 갈등의 장소로 변모했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냉전과 열전 사이를 오갔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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